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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채제공에게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내린 시호교지諡號敎旨다. ‘문文’은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함을 뜻하고, ‘숙肅’은 마음가짐을 과단성 있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 교지를 보관하던 함도 남아있다. 채제공은 병으로 인하여 1799년(정조 23) 1월 18일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부음을 듣자마자 21일 치제문을 보내 애도하고 한 달 만인 2월 19일에 시호교지를 내렸다. 뒤이어 장례일에는 사제 뇌문賜祭 誄文까지 내려 세상을 달리한 채제공에게 자신의 슬픔을 전하였다. 채제공의 장례는 3월 26일 사림장士林葬으로 치러졌고 경기도 용인龍仁 북동北洞에 안장되었다. 정조는 채제공에 이어 정민시鄭民始, 조심태趙心泰, 김희金熹, 이명식李命植 등 신임하던 여러 노대신들을 차례로 먼저 떠나보내고 채제공이 떠난 다음해인 1800년 6월 승하하였다.
채제공의 덕을 기록한 책으로 순한글 필사본이다.1791년 12월 채제공이 상소를 올린 일부터 말년의 10년간의 내용을 서술하고, 사후에 정조가 지어준 뇌문도 인용했다.
정조가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 원고의 편차를 정해 준 어정범례御定凡例다.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해 가을에 문인門人인 정약용丁若鏞(1765~1836)과 이가환李家煥(1742~1801) 등이 유고를 수습하여 교정하였다. 이듬해 정조는『 번암집』 편집과 간행에 큰 관심을 갖고 유고를 여러 차례 살펴본 뒤 직접 문집의 범례凡例를 지어 주며 편집 방향을 정해주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임금이 신하의 문집에 범례를 제정해 준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채제공에 대한 정조의 뜨거운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채제공이 1799년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난 뒤 정조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치제문이다. 정조는 '거센 물결 속의 지주산과 같았다.'라고 평가하였다.
조선후기 중국의 지형을 그린 채색 지도다. 조선의 8도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유구 등 총 지도 14장을 엮어 만든 장첩 중 하나다. 중국 주요 도시와 산천지명이 잘 표기되어 있다.
1788년 12월 26일 채제공이 정조에게 남인의 입장을 변론한 글이다. 당시 윤시동(1729~1797)은 상소하여 남인세려을 기사년과 무신년의 역적 중 남은 무리들에 불과하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채제공은 남인 가운데 자신들은 역모에 가담한 탁남이 아니라 허목을 따르는 청남의 후예이므로 그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했고, 정조년간 남인세력의 정치활동의 명분을 마련하였다.
1788년(정조 12) 2월 11일 정조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채제공을 의정부 우의정에임명하라는 비망기備忘記다. 당시 이를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으나 노소론계가 우세한 정국에서 정조는 오히려 그들을 파직시키면서까지 결국 남인계 채제공을 정승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으로 채제공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근100년 만에 남인계 최초의 재상이 되었다. 이후 채제공은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의 추존, 신해통공 실시, 화성 건설 등 정조의 주요 개혁정책을 앞장서 추진해 나갔다. 1780년(정조 4) 이후 비망기는 승정원의 사알司謁이 승지에게 전하면 승지가 1통을 베껴 쓴 뒤 이를 반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문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정조가 직접 작성하여 채제공에게 전한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에 이 비망기의 내용이 있으며『 번암집』 권수하卷首下의 배상비망기에는 같은 날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비망기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어필은 용정龍亭에 실려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무리를 앞세운 채 채제공의 집으로 전해졌다.
정조가 홍범산과 봉조산 등의 여러 산을 돌아보고 밤이 다 되어 화성행궁으로 돌아와서 채제공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어제시御製詩다. 편액으로 새기고자 ‘우물 정井’ 표격지에 쓴 것으로 이를 새긴 편액도 현전한다. 편액에는 어제시 원고 끝에 작은 글씨로 연대와 쓴 사람의 관직 및 성명을 “상지이십년 병진 춘 이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신 채제공 봉교근서 上之二十年丙辰春二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臣蔡濟恭奉敎謹書”라고 덧붙여 새겼다. 1796년(정조 20) 2월 채제공이 정조의 어제시를 써서 제작한 현판임을 알 수 있다.
1794년(정조 18) 정조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팔도의 관찰사와 광주·수원·개성의 유수에게 내린 「유제도도신윤음諭諸道道臣綸音」과 1783년 흉년 구휼 정책을 수록한 「자휼전칙字恤典則」이 1책으로 합본合本되어 있다.「유제도도신윤음」은 1794년 7월 가뭄과 8월 풍수해가 발생하자 정조가 내년에 있을 혜경궁홍씨의 환갑에 올릴 물자에 구애받지 말고 적극적으로 진휼하도록 명한 내용이다. 「자휼전칙」은 1783년 11월에 흉년으로 4~10세의 보호자 없이 걸식하는 아이들과 1~3세의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구휼책을 강구하라고 내린 윤음과 구체적인 9개 구휼책 조항인 사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영조대의 태의원 의관인 유중림이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증보하여 엮은 농서로 1766년(영조 42)에 완성했다. 『산림경제』의 농업 관련 내용이 소략하고 발전하는 농업기술 수준을 잘 반영하지 못했다 하여 증보한 것이다. 고금의 농업서적을 두루 수집 검토하여 『산림경제』 보다 항목을 더 늘려 23항목으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우리 농업의 현실과 관련된 자료를 속방으로서 활용하고 우리 농서이외에 중국 농서도 유용하다 생각되면 인용하였다. 유중림은 『산림경제』를 증보하면서 세 가지 면에 유의하였다. 첫째는 수리시설과 농지광작, 시비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농업생산 증진을 제시하고, 둘째는 농민 수입을 늘리기 위해 시장과 관련된 농업경영을 중시하였다. 특히 수전농업보다 수익성이 높은 한전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 번째는 월령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산림경제』에는 농가월령을 수록하고 있지 않아서 계획성 있는 농업경영을 하기에 불편하였다. 이 책은 『산림경제』를 계승, 발전시킨 농학서로서 농업기술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1858년 4월 10일에 홍현주가 보낸 간찰이다. 네 묶음의 좋은 종이를 받고서 고마움을 표하고, 중명이 부탁한 종관의 일은 당상이 오래된 병 때문에 일을 그만 두어서 당장은 부탁을 못하겠으니 때를 기다렸다가 도모하여야겠다고 하였다.
홍봉한의 장자인 안와 홍낙인의 시문집이다. 6권 3책으로 표지의 책차는 ‘천天・지地・인人’으로 표기하였다. 1787년(정조 11) 5월 정조가 서문을 짓고 내부에 명하여 간행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