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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고 본받기 위하여 1807년(순조 7) 화성어사(華城御史) 신현(申絢)이 건의하여 세운 지지대비 탑본이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부터 해마다 현륭원을 참배하였고 환궁할 때마다 수원과 광주(廣州)의 경계에 위치한 미륵현(彌勒峴)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 현륭원 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머뭇거리다가 도성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곳에 바위를 둘러싸여 대(臺)를 쌓고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자를 붙여 지지대라 하였다.정조는 1795년 환궁길에 이곳에 '지지대(遲遲臺)'라는 세 글자를 새기도록 명하였다. 지지대비명은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 1759~1816)가 글을 짓고 전(前) 판돈녕부사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이 글씨를 썼다. 비신 상단의 전액은 수원유수 홍명호(洪明浩, 1736~1819)가 쓴 것이다. 비명의 내용을 보면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 효심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정조가 막내 여동생인 청선군주에게 보낸 한글편지로 여름 더위에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청선군주는 1766년(영조 42)흥은부위 정재화(鄭在和, 1754~1790)와 혼인하여 1남2녀를 두었다. 이 편지가 작성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필체로 보아 정조 즉위 이후에 써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부모님의 회갑을 맞은 해에 친여동생들과 함께 수원행차에 동행하여 그 의미를 더하고자 하였다. 이때 청선군주 역시 아들 내외와 딸 내외 등을 대동하고 수원에 방문하여 혜경궁홍씨의 회갑잔치 등을 포함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였다.
청선군주방에 노비를 하사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문서의 뒷부분이 멸실되어 있어 정확한 발급시기는 확인하기 어렵다. 청선군주방은 청선군주가 거처하던 궁방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사이에 태어난 딸이자 정조의 둘때 여동생이다. 『승정원일기』1769년(영조 45) 1월17일 신하들이 화순옹주와 청연군주, 청선군주의 각 궁방에 내려주는 노비를 지급하는 일에 대하여 아뢰자 영조는 각 군주 방에 노비 80구를 지급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사패교지의 발급년도를 유추하면 청선군지가 가례를 행하던 1766년이거나, 혹은 추가로 노비를 하사한 1769년쯤일 것으로 보인다. 어보는 '시명지보(施命之寶)'가 날인되어 있다.
구왕궁에서 나갑균에게 발급한 참봉(參奉) 임명장으로 1947년과 1952년 두 번에 걸쳐 발급되었다. 둘 다 '융릉 건릉 근무를 명함'이라고 적혀있으며 '구왕궁인(舊王宮印)'이 날인되어 있다. 구왕궁은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왕실의 사무를 관장하던 이왕직(李王職)을 대신해 부르게 된 명칭이다. 나갑균이 융릉 · 건릉의 참봉으로 임명된 것은 『현륭원관선생안』의 마지막 장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해방 이후에도 조선왕릉인 융릉과 건릉은 책임자를 두고 지속적으로 관리하였다.
정조의 어제 시문, 윤음, 교지 및 편저를 모은 전집으로 총 184권 100책이다. 이 중 권57~58에 해당되는 「천원사실(遷園事實)」은 현륭원 조성과 관련된 사실을 종합한 것으로 이를 통해 정조가 현륭원조성을 처음부터 직접계획하고 진두지휘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상설(象設)조에는 현륭원 석물 조성의 전 과정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정조는 수원에 원침을 조성하니 수원부 출토의 석재(石材)를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석공들이 앵봉(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의 석맥(石脈)을 찾아 결국 앵봉을 대부석소(大浮石所)로 삼고 주변의 여기산(如岐山)을 소부석소(小浮石所)로 정하였다. 현륭원 조성에 중요한 석물이 수원부에서 채석되었고 정조는 이 석재의 품질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였다. 현륭원은 세자의 원소이지만 봉분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각종 석물을 지극 정성으로 갖추어 19세기 이후 능제(陵制)와 능석물(陵石物)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795년(정조 19) 1월에 이조에서 발급한 것으로, 정의(鄭漪, 1782~1832)를 무공랑행돈년부직장(務功郞行敦寧府直長)으로 임명하는 문서이다. 무공랑은 정7품이고, 직장은 종7품 관직이며 돈녕부는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정의는 정조의 여동생 청선군주와 흥은부위(興恩副尉) 정재화(鄭在和, 1754~1790)의 아들이다. 교첩의 발급사유는 사도세자에게 존호를 올릴 때 정의가 금인(金印)을 읽고 안(案)을 받들고 욕석집사(褥席執事)를 수행했기 때문에 그 보상에 따라 자급(資級)을 올려준 것이다. 정조는 이 해에 사도세자뿐만아니라 혜경궁에게도 존호를 함께 올렸다.
1795년 사도세자가 살아있으면 60세 환갑을 맞은 구갑(舊甲)이 되자 정조는 이를 기념하고자 사도세자를 포함한 왕실 어른들께 존호를 올렸다. 이를 위해 1794년 12월에 정조는 상호도감(上號都監)을 설치하고 75세의 채제공(蔡提恭)을 도제조(都提調)로 임명하여 지휘감독하도록 하였다. 정조를 오랫동안 보필한 채제공은 특히 사도세자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정조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채제공에게 보낸 이 어찰에는 정조가 사도세자 및 혜경궁 홍씨에게 존호 올리는 일에 자신이 깊이 관여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 심경이 잘 드러난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지도로 목판 인쇄 후 채색하였다. 『대동여지도』와 『청구도』에서 주로 사용한 산이나 나무의 형태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화면의 중앙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궁의 담장 우측에 경모궁이 꽤 넓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모궁과 이웃하여 남족에는 함춘원(含春箢)이 있고 동쪽에는 연지(蓮池)가 있으며 붂족에는 문묘(文廟)와 성균관(成均館)이 있다. 정조가 개건한 경모궁의 위차와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조선후기 시파와 벽파의 정치투쟁과 사도세자 관련 자료가 실린 책이다. 박하원(朴夏源, 1739~1806)이 저술한 내용을 손자인 박제대(朴齊大)가 편천하였다. 박하원은 1792년(정조 16)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후 정조를 친견,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물러 나와서는 사도세자의 시말을 담은 책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는 책을 보고 천명을 기다리라는 뜻을 전달하였고, 책명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34년 활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정만조(鄭萬朝, 1858~1936)가 서문을 지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임오화변의 전말과 그의 추존 및 시파 · 벽파의 대립 등을 기술한 책으로 4권 2책의 필사본이다. 고갑자(古甲子)로 '현(玄)'자는 '임(壬)', '고(皐)'자는 '오(午)'와 뜻이 통하므로 '현고'는 곧 사도세자가 승하한 임오년을 뜻한다. 원편 2권 1책과 속편 2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원편은 정조대에 출사한 박종겸(朴宗謙, 1744~1799)이 펴냈고 속편은 후대인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원편의 내용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죽음과 사도세자의 출생, 궁중의 암투와 사도세자의 행적, 시파 · 벽파의 갈등에 대한 당시 정세 등을 연대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속편에는 영조의 죽음과 정조의 즉위, 정조의 처분, 현륭원 조성과 정조의 원행 및 영남 남인의 사도세자 추승 만인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대의(大義)를 찬양한 책인 『어제표의록』의 책판이다. 본 책판은 『어제표의록』의 첫 면인 장차(張次) '일(一)'에 해당하는 것이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은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주청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영빈이씨는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나는 해인 1764년(영조 40)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희생시켜 종묘사직을 지킨 뒤 아들을 따라 세상을 떠난 영빈이씨의 행보에 대해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어머니로서 의리를 지켰음을 천명하고자 이 책을 지었다.
1749년(영조 25)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는 사도세자에게 치도(治道)의 방편을 10조목으로 나누어 훈계한 책이다. 서문에서 영조는 세자에게 섭정(攝政)을 맡기면서 자신이 25년 동안 겪은 통치경험을 체(體)로 하고, 그 위에 규모와 입지(立志)를 설정한 뒤에 근면으로 노력해 앞으로의 치정(治政)에 효과를 기하도록 훈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