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박물관] 유물자료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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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유사편(訓諭四篇)

1743년(영조 19) 영조가 사도사제의 관례(冠禮)때 교훈이 될 만한 글 4편을 석각한 인본첩이다. 내용을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대리석 석판 22매에 새겼는데, 석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한다.4언구의 <훈유시(訓諭詩)>를 비롯하여 훈유의 간행을 명한 <수훈원량(垂訓元良)>, 사도세자의 자를 윤관(允寬)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한 <예자설(睿字設)>, 사도세자에게 화압(花押) 즉, 수결(手決)로 '달(達)'자를 내려주며그 의미를 되새기라고 당부하는 <예압설(睿押說)>이 그 내용이다. 영조의 화압이 '통(通)'이니 사도세자에게 내려 준 압자(押字)와 합하면 '통달(通達)'이 된다.

수원 역대 목민관 송덕비군

송덕비(頌德碑)는 수원을 다스렸던 관리의 업적과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 불망비(不忘碑), 청덕애민선정비(淸德愛民善政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 뜻은 모두 동일하다. 수원 역대 목민관 송덕비들은 원래 수원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노송지대에 모아두었다가 박물관 건립과 함께 현재 수원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27기, 수원화성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10기가 이전되어 있다. 당대 수원지역의 인물과 업적을 파악할 수 있는 금석학적 가치와 함께 시대에 따른 비석의 양식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 1998년에 송덕비 37기를 일괄 수원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영조어필 벼루

영조어필 벼루는 뒷면에 영조(1694~1776)가 71세 때 자신의 연표(年表)를 친히 짓고 써서 새긴 특별한 벼루다. 연표 내용은 가로 2칸, 세로 10칸으로 구획한 직사각형의 표 안에 매우 작은 글씨로 새겨 넣었는데,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이란 글자가 있어 영조가 직접 짓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세로줄 1번째 칸에 "자성옹(自醒翁, 영조의 호)이 71세 망팔(望八)의 나이에 시력을 시험하는 연표(年表)를 쓰다"라는 글귀를 쓴 후 2~9번째 칸에는 영조가 태어난 갑술(甲戌, 1694)년 이후부터 여덟번째 갑(甲)자가 들어간 갑신(甲申, 1764)년을 맞아 자신의 일생을 10년 단위로 정리하면서 주요 행적들을 기록하였다. 마지막 칸에는 글을 짓고 쓴 시기를 적었다. 왕이 하사한 것으로 전해오는 벼루가 가끔 있지만 이처럼 왕과 관련된 명확한 기록을 가진 벼루는 매우 희귀하다. 명문도 왕이 아니면 새길 수 없는 내용으로, 왕의 글씨를 그대로 새겼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벼루는 약간 붉은 색을 띠며 어떤 무늬도 새기지 않은 소박한 것으로 평소 검약을 숭상하고 이를 실천했던 영조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상덕총록

『상덕총록』은 '재상 채제공의 덕을 모두 기록한 책'이란 뜻이다. 채제공 말년의 행적을 순 한글로 필사하였다. 채제공의 충성과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임금으로부터 받은 신임 등을 기술하여 집안의 딸이나 며느리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앞부분은 1791년 12월부터 1799년 1월 채제공의 죽음까지 채제공의 제사에 지어준 뇌문(誄文)을 인용하고, 또 뇌문을 풀이하며 채제공의 행적을 정리하였으며, 마지막에 뇌문을 가지고 채제공의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운 경위를 적고 있다. 책에 수록 된 내용은 주로 『번암집』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일부 『승정원일기』와 『홍재전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50개에 육박하는 어려운 한자어에 한글 주석이 달려있어 주요 원출전 자료인 『번암집』의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문헌 자료이다. 

번암고

정조대 초대 화성유수를 지내고 영의정까지 오른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문장을 모은 책이다. 채제공은 정조시대의 대표적인 재상으로 초대 수원유수를 지냈으며 수원화성 축성 당시 총리대신을 맡아 축성을 총괄한 인물이다. 총 3책 중 2책은 채제공의 문장 가운데 기문(記文)과 서문(序文)을 편집한 것이고, 1책은 묘지명(墓誌銘)과 묘표(墓表), 행장(行狀)을 모아 필사한 것이다. 필사된 기문은 총 50편이고 서문은 총 48편이며 목판으로 간행한  『번암집』과 편차는 다르지만 그 내용은 모두 수록되어 있다. 각 책의 첫 장 하단에는 오사(五沙) 이정운(李鼎運), 최헌중(崔獻重), 한치응(韓致應)이 펴내고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丁若鏞)이 교정하였다는 기록이 필사되어 있다. 책의 마지막에 '오사진필(五沙眞筆)'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채제공 사후 이정운이 채제공의 문장을 가려서 뽑은 이후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어보(御寶)인 '규장지보(奎章之寶)'가 날인되어 있으며, 임금이 열람한 어람본이다. 현전하는 채제공의 문집 가운데 어람본은 해당 문헌이 국내 유일하다.

영조 사(賜) 조현명 어필첩

영조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1690~1752)에게 직접 써서 내린 어필 5첩이다. 1739년(영조 15) 조현명에게 영조가 써서 내려준 사언구(四言句)의 칙유(勅諭)인  《대정일면유어서(大政日面諭御書)》 1첩, 1743년(영조 19)과 1745년(영조 21) 그리고 1746년(영조 22)에 조현명의 사직 상소에 대해 영조의 답변을 각각 써서 내려준 《수서비답(手書批答)》 등 3첩이다. 또한 조현명이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에 제수된 당일 영조의 진찰을 위해 입시하자 감회가 일어난 영조가 시를 써서 하사한 《주상전하어시어필(主上殿下御侍御筆)》 1첩이다. 서첩은 모두 무늬비단으로 꾸며져 있고 내지 앞뒤에 색종이를 붙이는 등 유사한 방식을 보인다. 각 서첩 겉표지의 제목 글씨는 모두 예서(隷書)로 쓰여져 있다. 서첩 내용의 어필은 영조 재위 시절의 전형적인 서풍을 보여준다. 조현명의 본관은 평양(平壤)이며 1719년(숙종 45) 문과 급제하여 영조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을 때부터 보호에 힘썼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을 진압한 공로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풍원군(豊原君)에 봉해졌다.

번암선생집

정조대 초대 화성유수를 지내고 영의정까지 오른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시문집 초고본이다.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 현륭원 조성, 수원 읍치 이전, 수원화성 성역 등 정조가 추진하는 주요 사업을 맡아 수행한 인물이다. 1799년(정조 24) 1월에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해 가을에 문인(門人)인 정약용(丁若鏞)과 이가환(李家煥) 등이 유고를 교정하였다. 이듬해 정조가 채제공의 문집 편집과 간행에 큰 관심을 갖고 직접 범례(凡例)를 지어 주며 문집을 편집하는 기준으로 삼게 했다. 표지 안쪽 면에 『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 구본(舊本)을 정조가 정해 준 범례대로 다시 편집하고 3본을 베껴 서울, 영남, 충청도에 보내니 더 이상 내용을 바꾸지 말고 이 책을 기준으로 간행할 것을 당부하는 별지(別紙)가 붙어 있다. 총 62권 30책 가운데 표지의 우측 상단에 '권수(券首)라고 표기된 제1책을 포함하여 27권 22책만 전한다.

정조 사(賜) 박종보 어찰첩

정조가 처남인 박종보(朴宗輔, 1760~1808)에게 보낸 친필 어찰 19통을 노랑색과 분홍색의 고급색지를 사용해 궁중 장황으로 꾸민 중요한 어찰첩이다. 내용은 정조가 박종보의 안부와 궁궐 출입여부를 묻거나 하사한 선물의 목록이 대부분이다. 이를 통해 처남인 박종보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종보는 1787년(정조 11) 누이가 정조의 후궁인 수빈(綏嬪, 순조의 생모)이 되자 음보(蔭補:특별대우로 관직에 오름)에 등용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정조 사(賜) 조심태 어찰첩

정조가 수원부사, 화성유수, 장용대장을 역임한 조심태(趙心太, 1740~1799)에게 보낸 어찰을 모은 첩이다. 어찰을 모은 첩이다. 어찰은 모두 13통인데 2통은 2장의 종이에, 나머지 11통은 1장의 종이에 썼다. 조심태가 수원부사로 임명된 1789년부터 장용대장으로 활동하던 1798년 사이에 정조가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을 중심으로 요동치던 당시의 정국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어찰첩이다. 어찰 내용을 살펴보면 정조는 수원에 있던 조심태와 수시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현지의 사정을 파악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처리해 나갔으며, 모종의 비밀 업무도 지시한 후 그 결과를 기다렸음을 알 수 있다. 조심태는 정조와 서로 밀서를 주고받던 핵심 측근 관료였다. 조심태는 1768년(영조 44) 무과 급제하고 여러 무관직을 두루 거쳐 1789년 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이때 현륭원(顯隆園)을 이장하는 일과 수원의 도시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일 등 어려운 임무를 차질없이 처리하였다. 이후 총융사, 금위대장, 어영대장 등을 지내다가 1794년 승격된 화성유수로 다시 제수되었고 수원 화성 축성의 주요 직책을 겸하였다. 정조가 번암 채제공과 함께 가장 총애하던 무반계 신하였다.

정조 어필 비망기

1796년(정조 20) 정조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파직한다고 친히 어필로 작성한 비망기(備忘記)다. 비망기란 왕의 명령을 적어서 승정원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다. 정조가 직접 쓴 비망기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례이며, 정조 말년의 원숙한 필체를 살펴볼 수 있다. 1788년(정조 12) 번암(樊巖) 채제공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약 100여년 만에 남인(南人)출신으로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좌의정을 지내고 1793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1795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정조가 사간원 헌납 유하원(柳河源, 1747~?)을 유배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그를 가르친 적이 있었던 채제공이 유하원을 두둔하자 화가 난 정조가 친히 어필로 비망기를 내려 채제공을 파직시켰다. 이 일로 채제공이 상소를 올려 견책을 청하자 정조는 채제공에 대한 믿음이 커서 책망한 말이 조금 지나쳤다며 위로하였다.

조돈영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부왕인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을 대리청정(1749~1762)하던 시기인 1757년(영조 33)에 조돈(趙暾, 1716~1790)을 경기도관찰사로 제수하면서 내린 명령서다. 왕이 내릴때는 유서((諭書)라 하고 세자가 대리청정기에 내릴 때는 영서(令書)라고 지칭한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시기에 작성된 희귀한 문서로 규모나 형식이 다른 영서에 비해 매우 뛰어나다. 조돈은 영·정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광서(光瑞)이며 호는 죽석(竹石)이다. 1740년(영조 16) 문과 급제 후 관직에 나아가 대사가,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조선경국전

조선경국전은 1394년(태조 3) 3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과 통치철학을 정리하여 왕에게 지어 바친 사찬(私撰)법전으로 1395년 처음 간행하였다. 주나라 제도인 『주례(周禮)』의 6전(六典)체제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한 후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법전은 개인이 저술했지만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정리, 제시한 국가 운영의 실질적인 설계도라 할 수 있다. 이는 후에 『경제육전』과 『육전등록』 등을 거쳐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모체가 되었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의 『조선경국전』은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유일한 최고(最古)의 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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