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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광무 5)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가 71세를 맞이하자 경운궁에서 거행한 진연의 전말을 정리자로 간행한 의궤다. 권수와 3권 3책을 합하여 본래 3권 4책이나 권수 1책만 전한다. 권수는 「택일」, 「좌목」 및 경운당진찬반차도, 경운당진찬도 등 각종 도설을 수록한 「도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권수 책을 따로 두어 택일, 좌목 및 도식을 수록하는 방식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혜경궁이 회갑을 맞은 이듬해인 1796년(정조 20) 6월 18일, 정조가 창경궁 영춘헌에서 혜경궁에게 술을 올리고 진찬을 베풀면서, 지난해 화성행궁의 낙남헌에서 혜경궁의 회갑연 때 읊은 시의운자를 이용해 지은 시다. 『홍재전서』 권7에 「영춘헌에서 축수 잔을 올리고 기쁨을 기록하면서 지난번 낙남洛南의 운을 사용하다」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정조는 각신, 승지, 사관, 2품 이상의 문무신들에게 모두 이 운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목재로 만들어진 칼집과 손잡이의 외부를 대모(바다거북의 등껍질)로마감하여 제작한 환도다. 은으로 장식하고 코등이는 백옥을 사용하였으며, 칼자루에는 보도와 잘 어울리도록 중간에 매듭을 맺고 술을 달아 격식을 높였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도검으로 철종 어진에 그려진 어도가 있다.
관제환도의 형태를 보이는 칼이다. 환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군도軍刀로 관에서 제작되어 장교들에게 지급되는 병기였다. 이 칼의 손잡이와 칼집은 흑칠로 마감되어 장식성이 높지 않지만 코등이가 투각기법으로 조각된 옥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마개 장식에는 은을 사용하여 격을 높였다. 이를 통해 신분이 높은 인물이 사용한 칼로 보인다. 을묘년 수원행차를 호위했던 장용영의 장교들도 이러한 칼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주사 지장전 내부의 나한을 찍은 사진엽서이다. 사진엽서 하단에 '수원화령전내나한'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지장전을 화령전으로 착각한 것이다.
용주사 지장전 내부의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이다. 도명존자상, 시왕상, 동자상, 인왕상 등은 모두 목조상이다. 사진엽서 하단에 '수원화령전내불상'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지장전을 화령전으로 착각한 것이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장안문 서측 성벽 여장 위에 앉아있다.
혜경궁홍씨의 회갑과 관련하여 정조와 신하들이 읊은 시를 모은 책이다. 1795년 윤2월 화성행궁에서 지은 화성봉수당진찬갱재축(華城奉壽堂進饌賡載軸), 화성장대열무갱재축(華城將臺閱武賡載軸), 화성낙남헌양로갱재축(華城洛南軒養老賡載軸)과 1795년 6월 18일 혜경궁홍씨의 환갑 당일에 지은 자궁주갑탄신갱재축(慈宮周甲誕辰賡載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화성행궁 봉수당 진찬시 정조가 지은 칠언(七言) 4운(韻)의 율시(律詩)와 이 시에 갱진한 홍준한(洪駿漢)과 그의 아들 홍낙수(洪樂受) 등 외빈(外賓) 70인과 유언호(兪彦鎬,1730~1796) 등 제신(諸臣) 77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화창한 봄날 화성(華城)의 풍경과 혜경궁홍씨를 함께 모시고 즐거움을 나누고 있는 감회를 표현하였다.
정조가 화성행궁에서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베풀 때 올린 음식 품목을 한글로 기록한 책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부편 1 : 찬품(饌品)」에 수록된 내용과 일치한다. 자궁께 올리는 찬안(饌案), 자궁께 올리는 주별미(晝別味) 1상, 내입(內入) 1상・2상・6상, 내외빈(內外賓)에게 올리는 상상(上床) 250상・중상(中床) 20상・하상(下床) 50상・주별미 70상, 조정상찬품(朝廷床饌品) 상상(上床) 15상・차상(次床) 205상・중상(中床) 100상・하상(下床) 130상, 시위백관상찬품(侍衛百官床饌品) 겸상(兼床) 60상, 유생하사찬품(儒生下賜饌品), 채화(綵花)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조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주칠 호족반으로 상판의 둥근 곡선이 유려하고 다리의 조각 수법도 뛰어나다. 주칠이 약간 퇴색하였지만 전반적인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인서록』을 간행 과정에서 원편(原編)은 기신(耆臣)들이 교열하고 서문은 정조가 지어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써서 바치도록 하였다. 『인서록』을 진상할 때 이를 축하하는 전문(箋文)은 정조가 1794년(정조 18) 9월 19일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채제공,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 전대제학(前大提學) 홍양호(洪良浩)에게 짓도록 명하였다. 이 어찰은 정조가 이 세 원로에게 보낸 것으로 오늘 중으로 전문을 지어 올리고 전문을 진상할 길일(吉日)을 택하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지어진 전문은 9월 24일 편전(便殿)에서 『인서록』과 함께 정조에게 바쳐졌다.
1794년은 자전(慈殿,정순왕후)이 오순(五旬)이 되고 자궁(慈宮,혜경궁홍씨)이 육순(六旬)을 맞는 해였다. 정조는 두 분의 장수를 축원하는 한편, 왕실 웃어른에 대한 효성이 왕실차원에 머물지 않고 전국의 노인에 대한 공경으로 확산되기를 바랐다. 많은 노인들이 장수를 누리는 것을 태평성대의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정조는 장수한 노인을 전국적으로 조사하여 『인서록(人瑞錄)』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범례(凡例)와 서문(序文)을 직접 지어 내렸는데, 이 서문은 정조의 어필이며 글자를 추가하여 수정하려 한 대목이 『홍재전서(弘齋全書)』 권9 「서인(序引)」에 반영되어 있어 『인서록』 서문의 초고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