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박물관] 유물자료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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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본 수원역 앞 시가지

1905년 경부선 철도개통과 함께 조성된 수원역 인근을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수원역은 1905년 1월에 영업을 개시한 후 수원의 물자와 인력이동수단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수원의 상관판도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수원역과 기존의 성내 번화가를 잇는 신작로의 개설로 인한 수원의 시가지 확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수원역사는 1928년 조선식으로 개축하기도 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역사가 전소되었다. 수원역사의 모습을 볼 때 이 사진은 한국전쟁 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수원화성

수원화성의 성곽 전체 모습과 성 안팎의 마을 조망할 수 있는 보기 드문 항공사진이다. 1796년 완공된 수원화성의 모습이 뚜렷이 남아 있으나, 장안문과 창룡문의 문루가 없어 한국전쟁 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문 위의 이방인

미군 일행과 함께 온 백인 여성의 모습으로 수원화성을 돌아보며 낯선 땅의 고적(古跡)에서 한 컷의 사진을 남겼다.

화홍문 앞 과일을 파는 노인

화홍문 앞에서 과일노점의 상인과 마치 흥정이라도 하는 듯 이방인의 미소가 흥미롭다. 수원화성의 명소로 유명한 화홍문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이므로 그 앞에 늘 노점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수원화성에서 절경으로 꼽히는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의 풍경이다. 화홍문 수문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노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이방인을 응시하는 팔짱을 낀 아이가 인상적이다. 지대가 높아 바람이 시원한 방화수류정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중동사거리에서 팔달문을 배경으로

중동사거리에서 팔달문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미군장교 옆의 입간판 내용이 당시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분주한 팔달문 밖 거리

팔달문 앞 대로를 활보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손수레를 끄는 사람들 틈으로 미군 트럭과 자동차도 바삐 움직이며 분주한 거리 풍경을 자아낸다. 오른편에 시외로 드나드는 버스정류장이 이곳이 수원의 중심지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너진 옹성벽에 수풀이 무성한 팔달문

수원이나 오산비행장에서 근무하던 군인들이 수원을 찾을 때 먼저 만나는 문은 팔달문이었다. 정문 앞에 세워둔 돌기둥과 오른쪽으로 돌아가라는 영문의 표지판으로 보아 사람들은 정문을 통과하고 차량은 로터리를 돌아가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미군 트럭이 들어오는 팔달문

팔달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려는 미군트럭에 군이 경계하고 있다. 군인의 철모에 'MP'라고 쓰여 있어 미군 헌병으로 짐작된다.

중층문루가 반파된 장안문

미 제5공군이 접수한 수원비행장은 연합군의 수송과 보급기지였으며, 폭격기부대의 발진기지로도 활용되었다. 개전 초기에 폭격을 맞은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자 서울로 향하는 관문으로 이후 탈환과 재탈환 과정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수원에 입성한 미군과 팔달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과 인접한 수원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후 9월 21일 미군 제7사단 정찰대가 마침내 수원에 입성하였다. 팔달문 앞에 미군들이 수원시민들과 섞여 있고, 팔달식당 앞의 전봇대에는 '大韓民國萬歲'라는 글씨가 보인다. 사진 뒷면에 미국 제7사단의 수원입성 관련 내용과 미 육군 상병 다니엘 톰킨스(Daniel Tompkins)가 사진을 찍었다는 영문 기록이 남아있다.

범람한 수원천변에서 빨래하는 사람들

사진 뒷면의 영문 기록대로 범람한 수원천변에 나와 여인들이 빨래하는 장면으로 군용트럭 안에서 촬영한 듯하다. 건너편 천변 가까이 늘어선 판자촌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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