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박물관] 유물자료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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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통편(大典通編)

정조는 1781년(정조 5) 기존의 법령을 수정 보완한 새로운 법전의 편찬을 위해 찬집정(贊輯庭)을 설치하였다. 1785년 편찬이 끝난 새 법전을 '대전통편'이라고 명명하였으며 다음해 부터 곧바로 시행하였다. 『대전통편』편찬으로 『경국대전』이후 삼백여년 만에 새로운 통일법이 등장하였다. 내용은 권1 이전(吏典), 권2 호전(戶典), 권3 예전(禮典), 권4 병전(兵典), 권5 형전(刑典), 권6 공전(工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총 723개의 조문이 각 항목별로 추가된 것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정조의 명으로 조선시대 역대 국왕의 업적을 모아 1782년(정조 6)에 편찬한 편년체(編年體)의 역사책이다. 실무적인 정치 지식이나 리더쉽에 대한 내용도 있어 제왕학 학습서로도 많이 활용되었다. 총재대신(總裁大臣) 김상철(金尙喆)이 편찬 업무를 총괄하였고 교정은 우의정 이복원(李福源)과 판중추부사 서명응(徐命膺)이 맡았으며 찬집(贊輯)은 지중추부사 채제공 등이 담당하였다. 정조가 지은 서문의 첫면에 '규장지보(奎章之寶)'가 날인되어 있다.

기축갱재첩(己丑賡載帖)

영조는 1769년 9월 4일 왕세손(정조)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삼청(三廳)의 권무군관(勸武軍官)들에게 시사(試射)하였다. 그리고 사현(沙峴)에 올라 명릉(明陵, 숙종)의 보토(補土)작업을 멀리서 바라본 후 어제시(御製詩)를 지었다. 이에 왕세손과 여러 신하 35명이 화답 시를 올렸고 이를 모아 갱재첩을 꾸몄다. 영조는 궐 밖 행차에 자주 왕세손을 대동하여 자신의 후계자가 왕세손임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화빈윤씨 납폐교서(和嬪尹氏 納幣敎書)

1780년 3월에 정조가 윤창윤(尹昌胤)의 딸을 후궁으로 맞으면서 보낸 납폐교서다. 정조의 비빈은 정비 효의왕후(孝懿王后, 1754~1821)를 비롯하여 후궁으로 원빈홍씨(元嬪洪氏, 1766~1779), 화빈윤씨(和嬪尹氏 1765~1824), 의빈성씨(宜嬪成氏, 1753~1786), 수빈박씨(綏嬪朴氏, 1770~1822)가 있다. 정조는 자식이 귀하여 효의왕후가 자식이 없었고, 첫 번째의 후궁인 원빈홍씨도 후궁이 된지 1년이 안되어 후사없이 죽었던 상황으로 화빈윤씨를 맞은 것이다. 국왕이 비빈을 맞이하는 국혼을 할 때는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삼간택을 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780년 2월 28일에 초간택을 하고, 2월 30일 재간택을 했으며, 3월 10일에 윤창윤의 딸로 최종선택을 한 다음 3월 12일 자경전(慈慶殿)에서 가례를 행하였다. 이 문서는 바로 화빈윤씨와 가례를 행하기 전날 3월11일에 홍낙성(洪樂性)을 보내 납폐를 행하는 교서다. 가례를 올린 후 화빈에 봉해졌고 경수궁(慶壽宮)이란 궁호를 얻었다. 1781년 화빈윤씨가 임신하여 얻은 서장녀는 일찍 죽었다.

규장전운(奎章全韻)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목판본의 한자 운서(韻書)이다. 1792년(정조 16)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완성하고 규장각 학자들이 교정하여 1796(정조 20)에 간행되었다. 조선의 한자음은 'ㅁ'안에, 중국의 한자음은 'ㅇ'안에 넣어 동시에 표기한 새로운 형태의 운서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정조의 이름 '祘'에 대한 발음 표기다. 그동안 정조의 이름 '李祘'은 발음이 '이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 책에 따르면 어휘(御諱) '祘'은 '셩'으로 발음한다는 내용이 있어 정조가 스스로 음가를 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책의 앞면에 수원부 유생 김교항(金敎恒)이 응제(應製)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김후 초상(金㷞肖像)

김후金㷞(1751~1805)의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김상걸金相傑(1727~1798)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7) 정시무과에 급제 후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790년(정조 14) 수원중군에 제수되었고 1791년 당시 수원부 읍치邑治의 외곽을 호위하던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중군을 역임하였다. 1793년에는 경기중군이 되어 경기지역의 모든 군사업무를 실질적으로 통솔하게 되는데, 수원화성 축성이 시작되기 딱 1년 전이었다. 정조가 의도적으로 수원 토박이 무반 가문 출신의 김후를 중용하였던 것이다. 1794년 2월 화성성역 별감동別監董이 되어 화홍문, 방화수류정 등 시설물의 현장감독으로 886일간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축성이 끝나자 그 공을 인정받아 숙마 1필을 하사받았고 이후 황해병사를 거쳐 내금위장에 이르렀다. 김후 초상은 40대 중반의 모습으로서, 오사모에 흉배가 부착된 단령을 입고 있는 상복본常服本이다. 가슴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수놓인 흉배가 부착되어 있어 무관 당상관임을 알 수 있다. 제작시기는 수원화성 축성을 마치고 그 공로를 포상받는 시점인 1796년 후반으로 추정된다. 김후 초상은 문관초상보다 숫적으로 드문 무관초상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가작佳作으로 평가된다. 김후 초상을 보관하던 함과 호수 그리고 호수함도 함께 전한다. 정조는 수원출신의 무관들을 수원화성 축성에 참여시켰는데, 해풍김씨 집안만 하더라도 김후 외에도 감동監董 김혁金爀과 김희金爔 등이 참여하였다.  

채팽윤 응제시첩(蔡彭胤 應製詩帖)

채팽윤은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 지은 “평생 동안 군왕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더니, 꿈속에 늘 옥 계단 두리번거렸네.(平生不識君王面, 一夢尋常繞玉墀)”라는 시 구절로 숙종의 환심을샀다. 그 이듬해 1691년 10월 밤에 숙종은 숙직하던 채팽윤을 불러 부자의 예로 대하라며 술을 따라 주었다. 채팽윤은 이 일을 계기로 평생 동안 문학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시를 지었다. 이 응제시첩은 1691년(숙종 17), 1692년, 1694년 시강원 설서 채팽윤이 숙종에게 제진한 13편의 응제시문을 보관하기 편하게 잘라 만든 첩이다. 응제시는 국왕이 시험문제를 내고 그에 응하여 글을 지어 내는 시험을 말한다. 문학적 재주가 뛰어났던 채팽윤은 응제시를 지을 때마다 호피, 표피 등 하사품을 받았다. 이 자료는 채팽윤이 독서당에서 공부하면서 임금과 응제한 실체를 알 수 있고, 계(啓)자 인장과 채점된 등수 등을 통해 응제시의 처리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희암집(希菴集)

채제공의 종조부 희암 채팽윤의 문집이다. 표지서명은 ‘희암집’이나 본문의 권수제는 ‘폐추’다. 수록한 글을 겸손하게 다 떨어진 빗자루에 비유하며 모아둔 것으로 보아, 이 책은 초고본으로 추정된다. 문집에는 3,000수에 달하는 다량의 시가 수록되어 있어 그가 문인으로서 시 창작에 얼마나 골몰하였는지 짐작케 한다. 숙종은 채팽윤의 시재를 높이 평가하여 그가 읊조리는 시를 베껴오도록 명하였고, 영조 역시 그의 문장을 세상의 으뜸이라 칭찬하고 기리며 그의 이름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채제공은 두 국왕에게서 시재를 인정받은 채팽윤에게서 시를 배웠다.

상아홀(象牙笏)

채제공이 사용했던 것으로 전하는 상아홀이다. 전체적으로 약간 굽어 있으며 손으로 잡는 아래 부분은 후대에 부른 비단으로 감쌌다. 『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에 따르면 1품부터 4품 관원은 조복(朝服)에 상아홀(象牙笏), 5품부터 9품 관원은 조복에 목홀(木笏)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금관조복본 초상화에서 상아홀을 든 채제공을 만날 수 있다.

채제공 호패(蔡濟恭 號牌)

1758년(영조 34) 발급한 채제공 호패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질과 기재내용에 달랐는데 『속대전(續大典)』, 「호전(戶典)」에 따르면 2품이상은 아패(牙牌), 생원과 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채제공 호패는 아패로 제작되었으며 앞면에 새겨진 '경자생, 계해문과(庚子生, 癸亥文科)'는 출생년도인 1720년(숙종 46), 문과 급제 연도인 1743년(영조 19)을 말하며, 뒷면에 새겨진 '무인(戊寅)'은 호패를 제작한 1758년이다. 번암은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79세에 치사(致仕)할 때까지 55년의 긴 세월 동안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세 조정의 큰 신하였다.

평강채씨족보(平康蔡氏族譜)

좌의정 채제공(左議政 蔡濟恭, 1720~1799)이 간행을 주도한 평강채씨(平康蔡氏)의 임자년(壬子年) 족보다. 평강채씨는 고려시대 명신(名臣) 경평공 채송년(景平公 蔡松年)의 후예며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이다. 채제공은 채송년의 19세손이며, 평강채씨 9개파 가운데 소감공파(少監公派)에 속한다. 표지의 책차(冊次)는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구분하였다. 제1책 첫장에 채제공이 1792년(정조 16) 5월에 쓴 서문이 실려 있고, 제4책 말미에는 1790년 8월부터 족보를 증수(增修)하게 된 내력과 도유사(都有司) 좌의정 채제공을 포함하여 편찬에 참여한 인물 명단이 첨부되어 있다.

채제공 초상 시복본 함

채제공 초상 시복본 2점을 함께 보관하던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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