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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초상 시복본의 보관용으로 제작한 직사각형 형태의 보자기다. 초상을 싼 누비보를 다시 감쌀 때 사용하였다. 보자기의 바깥 면은 붉은색이고 안쪽 면은 연하늘색이며 끝자락마다 초록색 수술을 매달아 장식하였다. 원형의 연초록색 보자기 2점은 초상 아래 하축(下軸)의 양쪽 끝 축두(軸頭)를 감쌀 때 사용하던 것이다.
1792년 장황한 채제공 초상 시복본을 보관할 때 사용하던 직사각형 모양의 누비보로 재질은 명주다. 가장자리에 먹으로 '시복 대소 각 일본(時服 大小 各 一本)'이라고 단정하게 쓴 글씨가 있어, 이 누비보로 원래 수원화성박물관 소장의 사복본과 대영박물관 소장의 시복본 2점을 함께 싸서 보관했음을 알 수 있다. 한지로 만든 띠지의 표면에도 붓글씨로 '번암선생 진 대소 각 일본(樊巖先生 眞 大小 各 一本)'이라 적혀 있어 이 같은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가 좌의정 채제공에게 부채를 하사하면서 같이 내린 어찰이다. 1743년(영조 19)24세의 나이로 문과 급제한 채제공은 강직한 성품으로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의 폐위를 목숨걸고 반대하여 영조와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존숭하는 사업 등 여러 가지 정책을 열성적으로 추진하였고 채제공은 이 모든 정책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정조가 부채를 하사하며 손수 써 준 이 어찰을 통해 이들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고 돈독했음을 엿볼 수 있다.
선추는 부채의 고리나 자루에 다는 장식품이다. 선추 안에 향을 넣어 좋은 향기가 나도록 해서 향낭(香囊)는 향합(香盒)이라고도 부른다. 채제공 초상 시복본에는 정조가 하사한 부채가 그려져 있다. 이 선추는 그 부채에 달려있던 것이다. 정조가 부채를 하사하면서 써 준 친필 어찰도 전한다.
채제공 초상 흑단령포본을 보관하기 위해 제작된 보자기다. 겉면은 적갈색이고 안쪽은 흰색이다. 보자기 우측하단 모서리에 '흑단령본(黑團領本)'이라는 글씨가 먹으로 쓰여 있다.
채제공 72세 때 초상 흑단령포본의 유지초본이다. 선묘로 간략하게 윤곽만을 그리지 않고 먹과 담채로 마치 정본(正本) 초상을 그리듯 하였으나 전신이 아니라 반신상이다. 뒷면의 얼굴과 흰 창의 등에는 배채(背彩) 기법을 사용하여 색감이 은은하게 배어나오도록 하였다. 단령의 어깨부분 수정을 위해 호분을 사용하였는데, 흑단령포본 정본의 어깨부위 수정 윤곽선과 정확히 부합된다. 이 초본은 화가의 작화과정(作畵過程)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다. 화면 우측에는 '영의정 문숙공 번암 채선생 칠십이세 진 초본(領議政 文肅公 樊巖 蔡先生 七十二歲 眞 草本)'이라는 제가가 쓰여 있고 좌측에는 '신해(1791) 춘 찰방 이명기 승명화 진장지내각(辛亥 春 察訪 李命其 承命畵 進藏之內閣)'이라는 기사가 부기되어 있어 이명기가 왕명으로 그린 채제공 초상이 내각에 수장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오사모에 흑단령을 입고 가볍게 공수(拱手)자세를 취한 채제공 72세 때의 전신의좌상이다. 얼굴은 좌안 8분면이지만 몸체는 거의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가슴에 쌍학흉배를 달고 허리에 서대를 두른 후 호피깔린 의자에 앉아 있다. 우측바닥으로 삐져 나온 호랑이꼬리가 너무도 탐스럽다. 바닥에는 화려한 문양을 수 놓은 화문석이 깔려있다. 얼굴은 부드러운 음영의 변조에 의한 효과를 살려내어 매우 사실적이다. 수염은 살색으로 바탕을 칠한 후 흰선으로 올을 세밀하게 그렸다. 의습의 주름 부위를 검은색 계통의 남청색(藍靑色)으로 그린 후 그 주변을 따라 조금더 어두운 운염(暈染)을 구사하여 옷의 질감을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작가는 미상이지만 화법 수준으로 보아 어진화사였던 이명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이 초상의 초본을 활용된 흑단령포본 3에 이명기가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한 때 충남 부여의 도강영당(道江影當)에 모신 바 있다.
채제공 초상 흑단령포본 초본1과 동일한 재질 및 양식으로 그려진 유지초본이다. 화면 우측에 쓰여진 글씨의 내용도 같다. 초본 1보다 단령의 옷주름이 좀 더 자세히 묘사되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채제공 65세 때 초상의 유지(油脂)초본으로 오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은 반신상이다. 초본을 그리는데 유탄 대신 연필 같은 흑연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회면 우측에 "영의정 문숙공 번암 채선생 육십오세 진 초본(領議政 文肅公 樊巖 蔡先生 六十五世 眞 草本)"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호는 사후에 하사 받은 것이므로 이 글씨는 채제공 사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채제공 65세 때의 초상 정본은 채규식 소장의 금관조복본 1점과 미천서원 구장(舊藏)의 흑단령포본 1점이 남아 있다. 이 초본은 오사모를 쓰고 있는 미천서원 구장의 흑단령포본 정본을 제장하기 위해 활용했던 초본으로 판단된다.
채제공 초상 금관조복본을 보관하던 함이다. 함의 뚜껑 안쪽 면에 '영진사봉안궤(影眞四奉安櫃)'라는 먹글씨가 쓰여 있다.
채제공 초상 금관조복본의 보관용으로 제작한 보자기이다.초상 좌우의 축두(軸頭)를 잘 감쌀 수 있도록 직사각형 보자기의 양쪽 끝을 반원형으로 만들었다. 묶을 때 사용하는 끈이 8개 달려있고 한쪽모서리에 '조복본(朝服本)'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1780-1799) 65세 때의 화려하고 장엄한 금관조복본 초상이다. 머리에 금관을 쓰고 붉은색 조복 차림으로 의자에 앉은 전신의좌상(全身椅坐像)이다. 금관조복본 전신 사대부 초상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이 초상이 유일하다. 화면 위로 길게 늘어뜨린 2줄의 유소 길이가 다른 초상들에 비해 유독 긴 것도 주목된다. 작가를 밝히지 않았으나 서양화의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입체감이 뛰어난 얼굴과 옷주름 그리고 화려하게 금박을 장식한 금관 등의 표현 기법을 감안할 때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화산관 이명기(華山館 李命基, 1752~1802)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속유물로 초상보관용 보자기 1개화 함 1개가 있다. 화면 우측에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병조판서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세손좌빈객 규장각제학 지실록사 번암 채제공 백규보 육십오세진(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兼兵曹判書判義禁府使 知經筵春秋館事 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孫左賓客 奎章閣提學 知實綠事 樊巖 蔡濟恭 白規甫 六十五世眞)"이라고 한줄로 쓰여 있다. 또 화면 좌측상단에 위치한 5행의 채제공 자찬문(自贊文)은 문인(文人)인 한성부판윤 이정운(李鼎運,1743~?)이 공손하게 썼다. 자찬문은 『번암집』에 「자제사진찬(自題寫眞贊)」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