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박물관] 유물자료실 입니다.
top

287건의 게시물이 있습니다. (10/24페이지)


옹성의 홍예문이 없는 팔달문(1)

옹성 밖에서 팔달문을 우측에서 비스듬하게 바라보면서 찍은 슬라이드 필름으로 홍예문이 없는 옹성의 모습이다.

화서문 위의 미군과 아이들

화서문 문루 위의 사람들과 군인들의 모습을 서북공심돈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슬라이드 필름이다. 화서문을 찾은 미군을 둘러싸고 아이들이 몰려있다. 화서문 주변 성안쪽으로 초가집들이 보인다.

익살스런 미군들의 모습

전봇대에 기대고 있는 미군들이 익살스런 표정과 동작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미군기의 폭격으로 중층 누각이 사라진 장안문

1950년 9월 26일 미군기의 폭격으로 장안문의 2층 중층 누각이 파괴되어 사라진 모습이다.한국전쟁을 거치며 수원에는 "남문은 남아있고, 서문은 서있는데,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갔네"라는 말이 생겼다.

팔달산 송전탑 아래 미군들

팔달산 정상에 올라 도심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진으로 추정된다.

홍예문의 선문(扇門)이 반쯤 떨어진 장안문

장안문 안쪽 홍예문의 부채모양 선문(扇門)이 떨어져나간 모습으로 불화살과 총탄을 막고자 붙인 철판인 철엽(鐵葉)이 남아있다.

축대 보수 작업

축대를 보수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장옷(長衣)

장옷은 치마 저고리를 입은 후 겉에 입는 조선시대 여성의 가장 대표적인 외출복이다. 이 유물은 소렴에 있었던 겹장옷으로 녹색이 뚜렷이 남아있다. 겉감은 구름무늬의 문능紋綾이고 안감은 성근 주紬로 만든 겹옷이다. 광교 신도시 개발로 인해 수원시 이의동에 산재한 안동김씨 세장묘역의 이장 과정 중, 참봉 김홍건金弘建(1580~1637) 묘의 바로 아래 묘에서 일괄 출토된 복식유물 중 하나이다. 피장자를 확인할 만한 유물이 동반되지 않아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지만, 묘의 위치로 짐작컨데 김홍건과 관련된 인물로 추정된다.

관습조사보고자료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의도에서 관습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 1906년 통감부 설치와 함께 각종 제도와 법률정비에 착수하였고, 이는 식민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철저한 준비 작업이었으며, 일제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조선에 대한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식민통치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종학은 친족, 상속, 유언 등에 관한 민법조사, 상행위, 회사, 해상 등에 관한 상법 조사, 지명유래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양한 분야에 걸친 보고서 750여점을 기증하였다. 현재 일제의 관습조사보고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와 미국 하와이대 서대숙 교수가 수집한 자료 등이 알려져 있는데, 이 중 이종학 수집 관습조사보고자료가 양적 질적으로 단연 앞선다.

삼사탑명첩 三師塔銘帖

연담蓮潭 유일(有一 1720~1799), 백련白蓮 도연(禱演 1737~1807), 완호玩虎 윤우(倫佑 1758~1826) 등 세 승려의 탑명을 비롯하여 이와 관련한 필사 자료를 모은 서첩이다. 서첩 안 첫 면에는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1892)이 수묵과 연한 채색으로 그린 〈월매도月梅圖〉가 있다. 다음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연담대사의 탑명을 직접 쓴 〈연담탑비명蓮潭塔碑銘〉이 있다. 초당初唐 구양순歐陽詢 서풍에 행서 필획을 가미하여 대자大字 해서로 썼는데 김정희 해서의 표준이 되는 중요한 예다. 이어 김정희가 짓고 쓴 이〈연담탑비명〉을 초의 의순이 내용을 수정하여 예서로 쓴 필적이 실려 있다. 연담의 법명은 유일有一이고, 자는 무이無二인데 합치면 ‘유일무이唯一無二’와 같은 발음이다.추사 김정희는 이 ‘유일무이’란 재미난 조합을 이용하여 〈연담탑비명〉을 지었고, 초의 의순은 자신의 글로 중간 이하 부분을 채워 새롭게 쓰게 된 것이다. 초의는 글 말미에 작은 예서로 추사가 쓴 글이 다듬어지지 않은 듯하여 맥락에 맞도록 글을 정리했다는 설명을 써 놓았다. 이 서첩은 연담, 백련, 완호라는 대둔사 세 승려의 탑명을 모은 점에서 의미가 있고, 정약용 등 문집에는 누락된 내용이 실려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김후 영정 및 영정함, 호수 · 호수함

김후(金㷞, 1761~1805)는 정조시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해풍(海豊)으로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贈戸曹參判) 김상걸(金相傑, 1727~1798)의 아들이다.  1771년 (영조 47) 정시무과에 급제한 후 출사하여 수원부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거쳐 1793년에는 경기 중군이 되어 경기지역의 모든 군사 업무를 실질적으로 통솔하게 되었다. 이는 정조가 의도적으로 수원 토박이이 srlagn를 화성성역 시작 1년 전에 중용한 것이었는데, 김후는 1794년 2월 화성성역의 별감동(別監董)이 되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성역이 끝나자 그 공을 인정받아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이후 황해병사를 거쳐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이르렀다. <김후영정>은 40대 초반의 모습으로서, 오사모를 쓰고 흉배가 부착된 단령을 입고 있는 상복본(常服本)이다. 가슴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수 놓은 흉배가 부착되어 있어 무관 당상관임을 알 수 있고, 허리에는 1품임을 나타내는 서대(㓾帶)를 두르고 있다. 제작시기는 화성성역을 마치고 그 공로를 보상 받은 시점인 1796년 후반으로 추정한다. 문관 영정보다 수적으로 드문 무관 영정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 작품은 화성성역에 실제로 깊게 관여한 인물의 후손들에 의해 거의 220년간 대를 이어 전해져 온 것으로, 영정을 보관하던 함과 군복에 착용하는 모자 장식인 호수(虎鬚) 및 호수함과 함께 2012년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서호 사진

게리 헬쎈(Gary Helsene)이 미육군의 엔지니어로 한국에 머무르며 1967년 수원 화성 풍경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전화번호
031-228-4122
담당부서
학예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