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박물관] 유물자료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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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도가 등武夷棹歌等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1874~1965)는 전남 보성 출신의 서예가이다. 본명은 진회震會, 자는 세경世卿, 호는 설주·빙설氷雪이고, 본관은 여산驪山이다.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1898)에게 경서와 서예를 배웠으며, 글씨는 이광사, 김정희, 미불, 동기창, 하소기 등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명서가의 글씨를 두루 구사했다. 이 서첩은 송운회가 주희의 「감흥感興」, 「무이도가武夷棹歌」, 「경재잠敬齋箴」, 구양수의 「여산고廬山高」, 제갈량의 「출사표」 등을 행초로 쓴 것이다. 이광사와 김정희의 서풍을 근간으로 하였음을 알 수있는 필적이다. 武夷山上有仙靈 山河寒流曲曲淸 欲識箇中奇絶處 櫂歌兩三聲閑聽 一曲溪邊上釣船 幔亭峰影蘸晴川 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巖暮烟鎖 무이산 위에는 신선 같은 영령이 있고 산 계곡에 찬물이 흘러 구비구비 맑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절경을 알고자 하면 뱃노래 두 세 소리 조용히 들어보게 첫 구비 계곡 가로 낚싯배 올라가니 정자와 봉우리 그림자가 맑은 시내에 잠기었네 무지개다리 한 번 끊겨 소식이 없으니 온 계곡과 바위가 저녁 안개에 잠겼네

소인향초도・취엽옥화도騷人香艸圖・翠葉玉花圖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1872~1942)가 바위 사이에서 자라난 국화와 파초를 수묵으로 그린 그림이다. 행서로 쓴 제발은 송宋 소순蘇洵의 오언시「국菊」 등을 썼다. 송태회는 산수도와 화접도, 사군자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를 시작으로 총 8회에 걸쳐 서예·묵매·산수화 등을 출품하여 입선한 후로 이름을 알렸다. 초년시절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 1904~1989)에게 묵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묵죽도墨竹圖

미산米山 허형(許灐 1862~1938)이 견 바탕에 수묵으로 그린 묵죽도이다. 바람에 맞서 지탱해 있는 대나무를 표현한 듯 보이며 신죽新竹에서 새로 자라난 죽엽은 농묵으로 처리하였다. 행서로 쓴 제발은 육유陸游의 시 「동호신죽東湖新竹」 중 일부이고, 말미에 ‘미산’이라 쓴 뒤 [허형지인許灐之印], [미산米山] 낙관을 찍었다. 허형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녀인 허건(許楗 1907~1987), 허림(許林 1917~1942)에게 그림 지도를 했고, 방계친족 허백련(許百鍊 1891~1977)에게 묵화의 기초를 가르치며 스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허련·허형·허건은 ‘운림산방 3대’라고 불렀으며, 허백련과 함께 근대기 호남화단의 족적을 남겼다는 평을 듣는다.

묵매 2폭墨梅 二幅

전라남도 화순 출신의 서화가 사호沙湖 송수면(1847~1916)이 그린 묵매도이다. 구불거리는 고매古梅는 농묵으로 줄기의 모양을 잡고 태점으로 마무리 했으며, 부러진 듯한 가지와 그 위에 새로난 가지를 표현하였다. 특히 일직선으로 표현한 조선식 매화가지는 담묵으로 표현하였다. 제발은 명 양기楊基의 「도산서제화매到山西題畫梅」 등을 행서로 옮겨 썼다. 송수면은 사군자 중에도 묵매와 묵죽을 주로 그렸고 전통적 화풍을 고수하였던 화가이다. 그의 화풍은 조카 송태회(宋泰會 1872~1942)와 아들 송대회(宋大會 1882~1956)에게도 전수되었다. 그밖에 섬세한 화풍의 호접도胡蝶圖도 잘 그렸다. 송수면의 자는 안여顔汝, 본관은 여산驪山이며 만년에는 노호老湖라는 호를 사용했다.

풍죽도風竹圖

벽산碧山 정대기(鄭大基 1886~1953)는 경상남도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로 사군자 중에서도 특히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다. 근대의 대표적 묵죽화가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1883~1950)에게 사사받았으며 청나라 판교板橋 정섭(鄭燮 1693~1765)의 묵죽화풍을 배웠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는 가을 비바람을 맞아 화면 밖으로 휘어진 대나무 줄기와 젖은 채로 나부끼는 잎을 빠르고 역동적인 필치로 표현했다. 죽엽의 필치에서 김진우의 화풍이 드러난다.

행서 칠언대구行書 七言對句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79~1944)는 경상남도 거제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진주로 이주하였으며, 아버지 하제봉河濟峰으로부터 김정희의 서풍을 전수받아 일가를 이룬 진주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일생동안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진주지역의 서예가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1909~1999), 도연陶然 김정(金正 1906~1999)등에게 추사체를 전수하여 지금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필적은 송宋 황정견黃庭堅의 「쌍정다송자첨雙井茶送子瞻」을 해행서로 쓴 것으로 역시 김정희의 전형적 행서풍을 따랐다. 우상편에 찍은 두인頭印은 김정희가 노년에 사용했던 호인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이다.

화훼 10폭병花卉 十幅屛

서동균은 경상북도 달성 출신의 서화가로 호는 죽농竹農·竹儂을 사용했다. 석재 서병오에게 서화를 배웠으며 그림에서는 문인화풍의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다. 조선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서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50세 때 서병오가 운영하던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畫硏究會를 물려받아 ‘영남서화원嶺南書畫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58세 때 ‘해동서화회海東書畵會’를 창립하였다. 10폭으로 구성된 이 병풍은 제1폭과 제5폭에 소나무와 포도를 그렸고 나머지 폭에는 사군자를 두 번씩 그렸다. 농묵을 중심으로 거칠고 두텁게 표현된 필치에서 오창석 화풍을 그대로 연상할 수 있다

행서 칠언절구行書 七言絶句

서동균(徐東均 1902~1978)이 당唐 노륜(盧綸 748~800경)의 「완춘희정이익翫春戱呈李益」을 행서로 쓴 것이다. 서동균은 송宋 황정견黃庭堅 등의 영향을 받은 행서를 주로 썼다. 이 행서는 서동균의 28세 초년필적이다. 안진경 서풍을 깊이 배웠던 서병오 행서와 흡사한 필치이며 작품의 두인頭印 또한 서병오가 즐겨 사용했던 [사무사思無邪]이다.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사제 간의 영향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掖垣春色自天來 紅藥當階次第開 萱草叢叢爾何物 等閑穿破綠莓苔 정전正殿 옆 담장의 봄빛은 하늘에서 절로 오고 섬돌 아래 붉은 작약 차례로 꽃을 피우는구나 빽빽한 원추리, 너희들 무슨 물건이길래 공연히 푸른 이끼 뚫어 갈랐느냐

행서 칠언절구行書 七言絶句

서병오가 당唐 이백李白의 「횡강사橫江詞」 다섯 번째 수를 행서로 옮겨 쓴 것이다. 서병오의 글씨는 안진경의 서풍을 바탕으로 하였고 김정희의 서풍을 비롯하여 중국의 소식, 동기창 글씨의 영향을 받았다. 이 필적은 안진경의 서풍을 바탕으로 한 행서로서 고른 행간을 유지하면서 글자의 크기와 필획 굵기를 달리하여 변화를 주었다. 橫江館前津吏迎 向余東指海雲生 郎今欲渡緣何事 如此風波不可行 횡강관橫江館 앞에서 나루 아전이 나와 맞으며 내게 동편 바다 구름 이는 곳을 가리키네 나으리, 지금 무슨 일로 건너시려는지 이런 풍파에는 갈 수가 없소이다

장석유화도莊石幽花圖

서병오(徐丙五1862~1935)의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석재石齋이다. 대구에 거주하면서 영남일원의 대표 서화가로 명성을 누렸다. 1922년 대구에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를 설립하여 후진을 지도하였으며 서동균徐東均, 성재휴成在烋 등의 제자를 배출했다. 또한 1922년부터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의 글씨와 사군자 분야 심사위원을 수차례 역임했다. 1901년을 전후로 중국 상해에 건너가 망명 중이던 민영익과 친밀히 교유했고 더불어 중국 서화가인 포화蒲華, 오창석吳昌碩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군자를 그리게 되었다. 이 묵란도에서 굵고 끝이 뭉툭한 잎의 표현 등 민영익閔泳翊의 화풍을 수용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서운도・지석도瑞雲圖・芝石圖

수암守巖 김유탁(金有鐸1875~1936)은 평양의 대표적 서화가이다. 양기훈楊基薰의 제자로 사군자·화조화를 배웠다. 1906년 근대 화랑의 효시인 수암서화관守巖書畵館을 설립했다. 김규진과 함께 1907년 서우학회西友學會 내에 교육서화관敎育書畵館을 개설하고, 평양의 기성서화미술회箕城書畵美術會에서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서울 삼청동에 서화지남소書畵指南所라는 사설 서화학원을 설립하는 등 지역과 중앙화단을 오가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서운도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붓질로 상서로운 구름의 모습을 표현하였고, 제발은 서하西河 임원준(任元濬 1423~1500)이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내린 시제에 응수하여 지은 것이다. 바위 틈에 난 영지를 그린 지석도의 제발은 명明 구우(瞿佑 1347~1433)의 「홍목서紅木犀」를 쓴 것이다. 목서는 신선 같은 벗을 의미하는 계수나무이다. <서운도瑞雲圖> 駘蕩三春後 悠揚萬里雲 凌風千丈直 映日五花文 祥光嶷玉殿 瑞氣擁金門 待得從龍日 爲霖佐聖君 화창한 봄이 지나간 뒤에 만리에 구름은 멀리 드날리도다 바람을 능멸하여 천길이나 곧고 햇빛에 비치어 오색무늬 찬란하구나 상서로운 빛은 옥전에 어리었고 서기는 금문을 에워쌌도다 용을 따라 나는 그날을 기다려서 비가 되어 성군을 도우리라

행초 오언시行草 五言詩

노원상(盧元相 1871~1926)이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04)의 「유가야遊伽倻」라는 선시禪詩를 행초서行草書로 쓴 것이다. 노원상은 평양 출생 서화가로 호는 호정湖停,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평양지역 화가 양기훈으로부터 화법의 기본기를 배웠고, 김규진으로부터는 난죽법을 배웠다. 서예에 있어 평양지역 서화가들은 조광진(曺匡振 1772~1840)을 바탕으로 한 웅건한 필치를 구사했는데 이 필적 역시 지역적 서풍이 잘 드러난다. 특히 태세太細의 변화가 크고 자형의 과도함을 보이는 등 김규진이 구사한 행초서와 매우 유사하다. 落花香滿洞 啼鳥隔林間 僧院在何處 春山半是雲 지는 꽃 향기 골짝에 가득하고 우짖는 새 소리 숲너머 들려온다 절은 어디메 있는가 봄 산은 절반이 구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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