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박물관] 유물자료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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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도黃菊圖

황용하(黃庸河 1899~?)의 호는 미산美山, 등운騰雲 등이며 자는 윤중允中이다. 개성출신의 황씨 4형제 서화가(종하宗河, 성하成河, 경하敬河, 용하庸河) 가운데 막내로 사군자에 뛰어났다. 형제들과 함께 송도서화연구회松都書畵硏究會를 운영하였으며 ‘황씨사형제전’을 수차례 개최하였다. 황용하는 사군자 그림 중에서도 특히 국화로 유명하였다. 황용하의 국화는 대개 꽃송이가 크고 만개한 꽃잎을 분방하게 표현하였으며, 수묵을 사용하여 빠른 필치로 그리는 점이 특징이다. 이 황국도에서도 역시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방자출진도芳姿出塵圖

효산曉山 이광열(李光烈 1885~1966)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활동하던 서화가이다.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 1854~1905)의 문하에서 글씨와 그림 지도를 받았으 며 사군자를 비롯한 전서, 예서, 행서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4~1951)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전주에 머물던 시기 설송雪松 최규상(崔圭祥 1891~1956)과 함께 전각과 전서를 배우기도 했다.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묵매墨梅》로, 이듬해에는 《묵죽墨竹》으로 입선하였다. 전주에서 유당 김희순, 설송 최규상 등과 함께 한묵회翰墨會를 창설하여 후진을 지도하 였으며 1933년 『전주부사全州府史』를 편찬하였다. 이 작품은 이광열이 담묵을 이용하여 그린 국화도이다. 화면 정면을 향하고 있는 만개한 대국大菊를 중심으로 그 하단에 탐스럽게 핀 두 송이 국화를 그려 넣었다. 전반적으로 마른 필치를 이용하여 비백이 드러나도록 그렸다.

국화菊花

김용진의 문인화 수법은 근대 중국 문인화의 거장인 오창석吳昌碩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 국화를 출품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김용진이 82세 때의 그림으로 오창석의 화풍을 바탕으로 화사한 색채를 구사하여 백국白菊과 황국黃菊을 표현했다. 이처럼 만년에 이르러 많이 그렸던 꽃그림들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색채구사와 전통적 품격의 필치는 김용진의 독특한 수법이다. 화면 좌상편의 화제는 청나라의 관료이자 학자인 오준吳俊이 오창석의 국화그림에 달아주었던 화제를 옮겨 적은 것이다. 김용진의 그림에 끼친 오창석의 영향을 재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다. 年年頭白東籬叟 種得菊花大如斗 酹以玉瓶桑落酒 潁雲 八二病叟 해마다 백발만 더해가는 동쪽 울타리의 늙은이는 심어 놓은 국화꽃 그 크기가 두斗만 하니 옥병에 국화주를 따르누나 영운 팔십이세의 병든 늙은이

묵국墨菊

크고 탐스러운 꽃잎이 인상적인 이도영(1884~1933)의 국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도영과 더불어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었던 정대유, 오세창, 윤용구, 유진찬, 김용진 등이 해파선생海坡先生을 위해 제작한 합작병풍 10폭 중 두 번째 폭이다. 이도영은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산수화·화조화·고사인물화·기명절지도 등 각 화목에 능했다. 1908년에는 소학교용 미술교과서인 『도화임본圖畵臨本』을 발행한 바 있다. 關河歲月感蹉跎 珠露金風日夜多 頓失人間憔悴限 名山一路有秋花 산하의 세월은 덧없이 흘러 이슬과 바람은 밤낮으로 많구나 인간의 초췌함은 끝도 없는데 명산名山의 길 하나엔 가을꽃이 피었네

석란石蘭

김용진은 민영익閔泳翊의 묵란墨蘭과 묵죽墨竹을 깊이 배웠으며 1921년부터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 1, 2회에 묵란을 출품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김용진 82세 때의 작품으로 민영익의 묵란 화풍을 바탕으로 풍부한 채색을 더해 화사하고 장식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화면 상단에는 가파른 절벽에 핀 난초의 모습을 그렸고 화면 하단에는 그림과 상응하는 판교板橋 정섭(鄭燮 1693~1765)의 시 「초벽란峭壁蘭」을 옮겨 썼다. 峭壁一千尺 蘭花在空碧 下有采樵人 伸手折不得 가파른 절벽은 일천 척인데 난초꽃은 푸른 하늘에 있네 절벽 아래 난초 캐려는 나무꾼 있어 손을 뻗어도 꺾을 수 없네

석란石蘭

조동욱(趙東旭 1899~1944)이 33세 때 그린 석란도이다. 김응원金應元과 민영익閔泳翊의 난법蘭法이 가미된 화풍으로 화면 왼편의 바위를 중심으로 위아래 두 무리의 난초를 그렸다. 화면 오른편에는 송宋 소식(蘇軾 1037~1101)의 「제난시題蘭詩」 구절 등을 옮겨썼다. 조동욱의 호는 송재松齋·무릉어인武陵漁人,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글씨를 잘 썼고 난을 주로 그렸다. 1925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작품을 출품한 이후로 1936년까지 선전과 서회협회전을 통해서 활동했다.

묵란墨蘭

임청(林靑 1893~1962)의 묵란도이다. 화면 왼편에는 봄날 무리지어 핀 난초를 그리고 오른쪽에는 청淸 정섭(鄭燮 1693~1765)의 시 「파분난화破盆蘭花」를 옮겨썼다. 임청은 주로 이하응李昰應과 그의 영향을 받은 김응원金應元의 묵란과 비슷한 화풍을 구사했다. 春雨春風洗妙顔 幽情逸韻落人間 而今究竟無知己 打破烏盆更入山 辛未 淸和月 小丁居士寫 봄비 봄바람에 아름다운 얼굴 씻고 조용한 정취 편안한 운치로 인간세상에 왔네 끝내 지기를 찾지 못해 검은 화분 깨버리고 다시 산으로 돌아가네 신미년 4월 소정거사가 그리다

청향유곡도淸香幽谷圖

최린이 66세 때 그린 묵란도이다. 꽃과 꽃대는 습윤한 담묵으로 그리고 잎은 농묵으로 그려 대비를 이룬다. 화면 좌상편에 쓰여 있는 화제에서는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맑은 향기를 내는 난초를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굴원屈原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듬성듬성한 난초의 모습과 가운데가 꺾여 바닥을 향한 잎의 표현 등이 어울려 쓸쓸한 느낌을 자아낸다.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은 1915년 서화연구회를 창설해 문인화, 서화, 사군자 등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썼고 그 일환으로 1916년 서화교습용 교과서인 《해강난죽보》를 발행하여 당대 묵죽과 묵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해강난죽보》는 2권 2책으로 상권은 난보蘭譜, 하권은 죽보竹譜로 구성되었다. 각각 난과 대나무를 그리는 기본 법칙에 대한 설명이 있고 이어서 김규진의 그림과 당대 각계 인사들의 제찬題讚이 수록되었다. 내용은 모두 음각으로 새겨졌으며 새긴 사람은 김춘배金春培이다. 이외에 김규진의 서화관련 저서로 《육체필론六體筆論》, 《서법진결書法眞訣》 등이 전한다.

석란石蘭

1921년 나수연이 자신의 회갑을 맞아 평생을 회고하는 내용을 쓴 〈회갑일지감回甲日志感〉과 1923년에 그린 이하응 화풍의 석란도이다. 석란도 왼편에는 원元 게혜사(揭傒斯 1274~1344)의 「춘란春蘭」을 옮겨썼다. 〈회갑일지감〉과 석란도 화제의 서풍은 역시 이하응을 추종했던 김응원(1855~1921)의 행서풍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두 작품은 나주나씨羅州羅氏의 편지·서화 등을 모은 《경보첩敬寶帖》에 수록되어 있다. 回甲日志感 孤露餘生已白頭 居然六十一年秋 劬勞恩重逢今日 瞻拜先塋感淚流 半生風雨宦遊難 樞院如今愧冷官 鎭日閒居無一事 偶拈湘管寫幽蘭 三淸洞裡富烟霞 鶴與梅花共一家 領得四時風景好 晩年詩酒送生涯 辛酉 十月 二十日 小蓬居士 회갑날 감회를 쓰다 외로운 이슬 같은 여생에 벌써 백발이 되어 어느덧 예순 한 살이네 부모님의 고생과 두터운 은혜로 오늘을 맞았으니 우러러 선영先塋에 절하니 눈물이 흐르네 반생을 비바람 맞으며 벼슬살이로 떠돌아다니며 고생했고 중추원에 있던 시절이 도리어 한직에 있는 지금보다 부끄러울 뿐이네 종일 한가히 아무 일 없어 어쩌다 붓을 잡고 그윽한 난초를 그리네 삼청동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학과 매화가 한 집을 같이 하네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 볼 수 있어 만년에 시와 술로 생애를 보내네 신유년 10월 20일 소봉거사 深谷暖雲飛 重巖花發時 非由採樵者 那得外人知 時癸亥夏四月 三淸山屋 小蓬 六十三翁 幷題 깊은 골짜기 따스한 구름 피어오르고 겹쳐진 바위 속에 꽃송이 피어날 때 나무꾼이 아니었다면 어찌 바깥사람들이 볼 수 있으리오 계해년 여름 4월 삼청산옥三淸山屋에서 63세 소봉이 그리고 제題함

석란石蘭

나수연(羅壽淵 1861~1926)의 호는 소봉小蓬,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남궁억南宮檍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 발간에 참여하였고 독립협회 총대위원으로 활동했다.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서화가로서 활동하였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되자 회원으로 참가하였고, 1921년부터 열린 서화협회전람회에 글씨와 문인화를 출품하였다. 이하응의 겸인 출신 제자로 석파난에 영향을 받은 묵란을 주로 그렸는데 이하응의 그림을 대필代筆할 정도로 비슷했다고 한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석란도를 출품했다. 獨坐山房午日長 幽蘭花發滿庭芳 偶然寫得淋灕趣 半是煙霧半是香 산방에 홀로 앉으니 낮이 길기도 한데 그윽한 난에 꽃이 피어 뜰에 향기가 가득하다 우연히 그려내어 흥건한 아취를 얻었으니 절반은 연기와 안개이고 절반은 향기로다

석란도石蘭圖

이 그림은 바위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난을 배치하는 이하응의 화풍을 충실히 따른 작품으로 난초의 색을 청록으로 하여 장식성을 더했다. 김응원의 호는 소호小湖이다. 출생과 성장 대해 알려진 것이 드물다. 이하응李昰應의 수종隨從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이하응의 난초 그림을 본받아 묵란墨蘭에 뛰어났다. 1911년 서화미술회 강습소가 개설되었을 때 교원으로 참여하여 묵란법墨蘭法을 가르쳤다. 1918년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石不能言花無語 傳聲空谷風兼雨 己亥冬 漢城 小湖居士 金應元寫 小湖 金應元 돌이 말을 하랴, 꽃도 말이 없으니 텅빈 계곡에 바람과 빗소리만 들리네 계해년 겨울 한성 소호거사 김응원 그리다 소호 김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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