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박물관] 유물자료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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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죽도병蘭竹圖屛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난초, 대나무를 중심으로 그린 병풍이다. 난초, 대나무를 번갈아 가며 그렸고, 제7폭에 단독으로 괴석 그림을 배치한 뒤 각 폭마다 화제를 썼다. 화제와 그림을 다양하게 배치하며 화면 가득 채워 그린 특징이 두드러진다. 윤용구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해관海觀·수간睡幹·장위산인獐位山人 등이 있다. 1871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위주로 썼으며 그림은 난초와 대나무를 즐겨 그렸다. <제1폭> 寫蘭 氣韻爲先 墨須精品 水必新泉 砸滌宿垢 筆純忌堅  馳驟格絹之間 逍遙臼之表  所謂 從心所慾不踰規矩 난초를 그리는 것은 기운氣韻을 우선으로 한다 먹은 모름지기 정품精品을 쓰고 물은 반드시 새 샘에서 길러오고 벼루의 묵은 때를 씻어야 하고 붓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워야 한다 종이와 비단 사이로 붓을 휘두르는 사이에 티끌 많은 세상 밖을 한가로이 노니니 이른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고 할만하다

석란石蘭

옥경산인玉磬山人 윤영기(尹英基 ?~?)가 그린 석란으로 돌 틈에서 자란 난초를 상하단에 배치하여 그렸다. 이러한 구도는 석파 이하응이 주로 그렸던 방식인데 특히 난엽의 표현에서도 석파란石坡蘭이 그대로 느껴진다. 운영기는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인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을 설립하였고, 이후 평양에서 기성서화미술회箕城書畵美術會를 창립하였다. 그림에서는 특히 난초를 잘 그렸으며 이하응을 대신하여 많은 난초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전한다.

묵매墨梅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그린 묵매도이다. 화면 하단부에서 하늘로 향해 꺾여있는 고매를 표현하였다. 굵은 수간에는 농묵으로 태점을 찍고, 직선으로 뻗어나간 새로난 가지를 표현하였다. 김은호는 섬세한 필선과 맑고 우아한 채색을 쓴 그림을 주로 선보였는데 묵화 작품을 살필 수 있는 예이다. 김은호의 호는 이당以堂, 아명은 양은良殷,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인물·산수·화조·영모 등 다양한 화목을 다루었다. 1912년 입학한 서화미술회 화과畫科에서 조석진·안중식에게 그림 지도를 받았다. 서화협회의 정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서화협회전람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출품하였다. 1924년에는 고려미술원에서 변관식과 함께 수묵화와 채색화 수업을 지도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고매도古梅圖

최린(崔麟 1878~1958)은 함경남도 함흥咸興에서 태어났으며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호는 고우古友·도호道號·여암如庵이다. 3·1운동에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3년 가을, 최린의 66세 때 그린 고매도이다. 백매白梅가 만개한 굵은 고목을 중심으로 그 옆에 가늘게 자란 매화를 표현하였다. 이 매화 잎은 윤곽을 준 뒤 먹으로 채웠다. 화면 왼편 상단의 화제에는 ‘가을 등나무에서 환상처럼 나타난 매화’ 라고 썼다.

묵매墨梅

눈이 내리고 난 뒤 바라본 매화를 그렸다. 화면 오른편에는 송宋 정직경丁直卿의 시 「설후개창간매雪後開窗看梅」를 옮겨 썼다. 자구에 일부 차이가 있다. 김규진(金圭鎭 1864~1933)은 사군자·산수화·화조화花鳥畵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난蘭과 대나무 그림을 즐겨 그렸다.

고간생영古幹生英

화면 좌상편에 있는 예서 제목대로 오래된 줄기에 핀 매화를 그렸다. 매화꽃을 담묵으로 윤곽을 그린 뒤 엷게 채색하여 백매白梅와 홍매紅梅를 표현하였고, 특히 청색 물감을 이용하여 태점苔點을 표현하였다. 화제에는 화광도인花光道人의 필의에 따라 그렸다고 적혀 있다. 화광도인은 북송北宋의 선승화가 중인仲仁을 말한다. 정대유(1852~1927)의 호는 우향又香·금성錦城,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의 아들이다. 서예는 예서와 행서를 잘 썼고, 그림에서는 매화와 괴석을 즐겨 그렸다. 1911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교수진으로 참여했다. 1918년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21년에는 3대회장으로 추대되어 첫 서화협회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의 글씨, 사군자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묵매墨梅

허련(許鍊 1808~1893)의 묵매도墨梅圖이다. 구불구불 꺾인 메마른 가지에서 하나 둘 피어나고 있는 매화를 그렸다. 그림 우측 하단에는 후손 허달許橽의 배관기拜觀記가 있다.

호애공생互愛共生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소전素荃·小田이다. 전라도 진도珍島 출신의 서화가이다.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 등을 통한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제3회부터 제10회까지 글씨를 출품하여 제9회·제10회에서 특선을 받았고, 서부가 폐지된 제11회부터는 출품하지 않았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을 지내는 등 광복 이후에도 서예계 중심에서 활동했다. 특히 ‘서예’라는 말을 창안하여 서예계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전서·예서를 바탕으로 ‘소전체素荃體’라는 특유의 서풍을 창안하였다. 이 필적은 “서로 아끼며 함께 살자”는 뜻을 전서로 쓴 것이다.

득기정 망기추得其精 忘其麤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서화가로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무호無號·수재壽齋이다. 일찍부터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과 글씨를 배웠으며, 서화협회 회원으로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글씨는 오창석吳昌碩의 전서를 따른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병자년(1936) 새해를 맞이하여 『열자列子』 「설부說符」편에서 여섯 자를 골라 전서로 쓴 것이다. “정수를 얻고 대강의 것은 잊어버린다[得其精 忘其麤]”는 뜻이다. 작품 말미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비워두고 “□□대인법정[□□大人法正]”이라고 필사한 것은 이 글씨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사전 제작품임을 시사한다. 《석고문石鼓文》의 바탕 위에 거칠고 투박한 필치를 더했는데 이는 오창석 전서의 특징이다. 오창석 전서를 매우 애호하였던 이한복은 조선미술전람회 서부書部 출품 때에도 대부분 오창석의 서풍을 따른 전서를 출품하였다.

행서 칠언시行書 七言詩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의 호는 춘곡春谷,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도쿄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공부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전통회화와 서양화를 절충한 화풍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화협회의 초대 총무를 지냈고,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에서〉라는 유화를 출품하는 등 서화계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945년 이후 대한미술협회장, 대한민국예술원장 등을 지냈으며, 1960년에는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작품은 고희동이 축하연 자리에 참석해 흥을 돋우기 위해 짓고 쓴 것이다. 북송北宋 황정견(黃庭堅 1045~1105)과 그를 추종했던 김돈희의 서풍이 혼재된 행서이다. 주로 그림으로만 알려진 고희동의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글씨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黃鳥聲中白日長 華筵祝酒滿樽香 斑衣罕見今萊子 棠樹仍成古伯康 座有嘉賓同北海 性全亂世臥南陽 叨參賀席無他語 歲歲年年擧此觴 春谷 高羲東 꾀꼬리 소리 속에 한낮이 길고 화려한 자리 축하주 잔 가득 향기롭네 색동옷 보기 드무니 오늘의 노래자요 산앵두나무 그대로니 옛날의 백강이로다 자리에 귀한 손님이 있으니 북해와 같고 난세에 천성을 온전히 하니 남양의 와룡이네 외람되이 축하 자리에 참여하였으니 달리 할 말은 없고 해마다 해마다 이 술잔을 드소서 춘곡 고희동

정선색서停船索書

현채(玄采 1856~1925)의 대자 초서 필적이다. ‘정선색서停船索書’는 백제의 사신이 남조 양나라의 명필 소자운(蕭子雲 487~549)에게 글씨를 구하려고 떠나는 배를 멈추게 했던 고사를 일컫는다. 이 필적은 안진경의 온후한 서풍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거칠고 과감한 필치로 운용하였다. 근대기 서풍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현채의 호는 백당白堂, 본관은 천녕川寧이다. 1873년 역과에 합격하여 부산 감리서監理署의 번역관이 되었다.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잘 쓴 서예가로 알려져 있으며, 개화기 한국사학의 개발과 계몽에 앞장섰다.

행서 칠절行書 七絶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이 1931년 청淸 왕사진(王士珍1634~1711)의 「진주절구眞州絶句」를 행서로 옮겨 쓴 작품이다. 이도영의 자는 중일仲一, 호는 관재貫齋·면소芇巢·벽허자碧虛子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서화가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의 문하에서 배웠고, 1911년 개설된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그림을 지도했다. 1918년 조석진, 안중식 등과 함께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서화협회에서 개설한 서화학원의 동양화부 지도를 맡았다. 1922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심사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글씨에서는 예서와 행서를 잘 구사했다. 危棧非流萬仞山 戍樓遙指暮雲間 西風忽送瀟瀟雨 滿路槐花出故關 辛未 梧秋 貫齋 李道榮 만 길 높은 산에 걸친 하늘 다리 물 흐르듯 저문 구름 사이로 수루가 멀리 아른거린다 서풍에 갑자기 쏴아 비가 내리고 길에는 홰나무 꽃 가득한데 나는 고향을 떠난다 신미년 음력 7월 관재 이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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