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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한 바람이 부는 너른 대나무 밭” 이라는 뜻의 김용진(金容鎭 1878~1968)의 대자大字 예서이다. 김용진은 주로 한나라 《장천비張遷碑》의 필의를 바탕으로 강건하고 고졸한 예서풍을 구사했다. 1958년 음력 6월에 쓴 필적이다.
민형식(閔衡植 1875~1947)이 당唐 이백(李白 701~762)의 「왕우군王右軍」이란 오언시를 안진경 풍으로 쓴 것이다. 왕우군은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를 말하는데 그가 ‘우군장군’이란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다. 민형식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공윤公尹, 호는 우하又荷이다. 민영휘閔泳徽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평안도관찰사, 법부협판 등을 지냈다. 1907년 학부협판 재직 시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 계획에 1만 4천냥을 희사했다.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항일 민족운동을 지원하였다. 右軍本淸眞 瀟洒在風塵 山陰遇羽客 要此好鵝賓 掃素寫道經 筆精妙入神 書罷籠鵝去 何曾別主人 珊瑚碧樹室主人 閔衡植 왕희지는 본래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세속에 있었네 산음에서 우객[道士]을 만나 잘생긴 거위를 구하고자 하였지 하얀 비단에 도경을 써 주었는데 글씨의 정묘함은 입신의 경지였지 쓰고 난 뒤 거위를 장에 담아 가져갔으니 무엇하러 주인에게 작별을 하리 산호벽수실주인 민형식
김돈희가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의 오언시를 예서로 옮겨 쓴 필적이다. 김돈희의 예서는 자유분방하고 변화가 많은 서풍을 보인다. 김돈희는 1918년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2년부터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으며 서예부문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서예연구단체인 상서회尙書會를 운영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不慣君王近 江湖夢往來 有如潮水去 遙望漢陽廻 임금님 가까이 모시는 일 익숙지도 못한 터에 강호에서 왔다 갔다 꿈 꾸는 건 웬일인지 마치도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가서 한양을 바라보고 돌아왔네
김돈희(金敦熙 1871~1930)가 가을의 심정을 읊은 시를 적은 행서 작품이다. 김돈희의 자는 공숙公叔, 호는 성당惺堂,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 김동필金東弼 은 사자관을 지냈다.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 각 서체를 두루 구사했으며 해서는 안진경, 행서는 황정견의 서풍을 깊이 배웠다. 이 행서는 안진경·황정견을 바탕으로 북위 해서풍을 가미하여 온후한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기축년(1925) 55세에 썼다.
유창환이 『예기禮記』의 「공자한거편孔子閒居篇」 등의 길상 구절을 예서로 옮겨 쓴 작품이다. 김정희를 비롯한 청대 비학파들이 추구했던 파임 없는 서한 예서풍이며 특히 《노효왕각석魯孝王刻石》을 따른 듯 보인다. 김정희는 한예의 궁극적 묘처는 오직 ‘고졸古拙’에 있다고 하여 고아함이 남아있는 촉도蜀道 지방의 여러 비를 반드시 먼저 익혀야 속예俗隷의 자태가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촉도 지방의 예서는 파책이 없는 서한 예서를 이른다.
유창환이 당唐 위응물(韋應物 737~792)의 「동포자추재독숙同褒子秋齋獨宿」을 쓴 초서 필적이다. 원필세를 강조한 명대 초서풍을 터득하여 유창환 특유의 개성을 보이고 있다. 유창환은 여러 서체를 두루 썼는데 특히 초서에 뛰어나 지운영(池雲英 1852~1935)으로부터 ‘초성草聖’이라 절찬을 받기도 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작품도 대부분 초서였다. 12폭의 합작 병풍 중 마지막 폭에 해당한다. 山月皎如燭 霜風時動竹 夜半鳥驚棲 窓間人獨宿 愚堂 兪昌煥 산의 달빛 밝기가 촛불과 같고 서릿 바람 때때로 대숲을 움직이니 한밤중에 새들은 둥지에서 놀라고 창 사이엔 사람이 혼자서 자네 우당 유창환
유창환(兪昌煥 1870~1935)이 서화와 관련된 여러 시문을 모아 필사한 서첩이다. 표지는 일본 경도京都에서 생산되던 비단을 사용했다. 내용은 명나라 심주(沈周 1427~1509)의 「제유완암산수題劉完菴山水」를 비롯하여 글씨를 쓰는 법도, 역대 서예가들의 서론書論 등의 글을 모아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 각 서체로 적었다. 각 서체가 끝나는 곳마다 따로 낙관하고 성명인[유창환인兪昌煥印]을 찍었다. 문인·서예가로 알려진 유창환의 자는 주백周伯, 호는 우당愚堂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금석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글씨는 각체를 모두 잘 썼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선했다.
근대 서화가·사진가로 널리 알려진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행서 필적이다. 북위 육조체를 바탕으로 둔중하고 거친 필획으로 구사하였는데 일부 글자 크기에서 과장된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서풍은 김규진, 호정湖亭 노원상盧元相 등이 구사한 근대기 특징적인 요소이다. 김규진의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 백운거사白雲居士 등이 있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글씨로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 각 서체의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915년에는 근대적 미술 교육기관인 서화연구회를 창설했으며, 1918년에는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2년부터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와 사군자 부분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得好友來如對月 有寄書讀勝看花 海岡 좋은 친구가 찾아오니 달을 대하듯 하고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꽃을 보는 것보다 좋구나 해강
오세창이 고대의 다양한 명문銘文을 임서한 8폭 병풍이다. 고전체로 된 명문은 식별이 가능하도록 예서와 해서로 풀어 썼으며 간략한 설명도 첨부하였다. 병풍 뒷면에는 오세창이 직접 쓴 ‘병본십폭屛本十幅 역대각 체서歷代各體書’라는 작품설명서가 붙어 있다. 이에 의하면 본래 10폭이 었으나 8폭만 남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첨에 따르면 오세창이 전 라북도 무장茂長 지역의 여러 현인에게 축하 기념품으로 증정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1875~1947)의 회갑을 맞아 써준 축시이다. 오세창과 민형식의 교유관계를 살필 수 있다. 민형식은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양자로 한말에 관직을 지내다 1907년 을사오적 암살계획에 찬동, 거금을 희사했고 그로 인해 유배되기도 했다. 그 뒤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하는 등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오세창은 본래 예서를 즐겼으나 전각으로 다져진 고문자에 대한 이해를 전서로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종정금문과 와전명문을 임모하여 다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러한 임모를 바탕으로 방작과 창작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 필적 역시 고대의 상형고문을 임서한 것이다. 종정금문의 자형을 따랐지만 상형성을 더 살리고 행간과 자간의 변화를 주어 예술성을 표현하였다. 두인은 [수양首陽]이며, 낙관은 [오세창인吳世昌印] [위창葦滄]을 찍었다.
오세창이 전서로 ‘죽청매수묵묘다향竹淸梅瘦墨妙茶香’ 여덟자를 쓴 것이다. 오세창은 오창석을 포함하여 등석여(鄧石如 1743~1805), 오희재(吳熙載 1799~1807), 오대징(吳大澂 1835~1902) 등 청대 명서가의 서풍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이 필적에서도 오희재를 바탕으로 한 청대 명서가의 전서풍이 잘 드러난다. 두인 [수양首陽]과 [오세창인吳世昌印] [위창葦滄]이라는 낙관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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