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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이 주周나라 선왕宣王의 업적을 칭송한 내용을 새긴 『석고문石鼓文』의 일부를 임서한 것이다. 1923년 중양절重陽節에 사회운동가였던 추인秋人 정교(鄭喬1856~1925)를 위해 써준 것으로 보인다. 오세창은 청대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의 영향을 받아 『석고문』을 꾸준히 학습하였는데 이 필적은 오창석 필의가 두드러지는 『석고문』이다. 오세창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가출옥한 이후 본격적인 서화 활동에 몰두하였다. 특히 서화협회에서 개설한 ‘서화학원’에서 후진 양성에 참여했고,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서로 출품하여 서부 2등을 수상하였다. 두인 [무상승無上乘], [금시법金屎法]과 말미에 [오씨吳氏], [한도인년육십이후료작閒道人年六十二後聊作]이라고 낙관했다.
오세창(1864~1953)은 본관이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이다. 3·1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 서화가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아들이다. 전각과 서예에 뛰어났고 서화감식에 깊었으며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을 편집하였다. 이 서첩은 오세창이 청대 서화가 등석여(鄧石如1743~1805)의 《백씨초당기白氏草堂記》를 똑같이 모서摹書한 것이다. 오세창은 1919년 3·1 대한독립 선언으로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는데 신해년(1911) 가을 음력 7월에 쓴 이 서첩은 수감 이전 필적임을 알 수 있다. 오세창의 전서 수련의 예를 살필 수 있고, 이러한 전서풍은 성재性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에게도 영향이 되었다. 첫 면의 두인으로 [청전구물靑氈舊物], 마지막 면에는 [열수오세창인신洌水吳世昌印信], [오세창소장금석문자吳世昌所藏金石文字] 낙관을 찍었다.
권동진(權東鎭 1861~1947)의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애당愛堂·우당憂堂이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이었고, 신간회新幹會 활동을 통해 항일민족 운동을 했다. 이 필적은 권동진이 행서로 원대元代 왕운王惲의 시 「태백독작도太白獨酌圖」를 쓴 것이다. 정삼품正三品 재직 당시 필적이며, 말미에 [권동진인權東鎭印], [화산華山]이라고 낙관을 찍었다.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근대의 정치가이자 서화가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자상子相이고 호는 운미芸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이다. 1894년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오창석吳昌碩, 포화蒲華 등의 중국 서화가들과 교유했고 김규진, 서병오 등 한국 서화가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중국과 한국의 서화교류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 서첩은 민영익이 행서로 불교 관련 시 구절을 첩의 앞뒷면에 걸쳐 필사한 것이다. 민영익은 안진경을 배웠고 아울러 동기창, 옹방강翁方綱, 하소기何紹基 등 명·청대 서화가들의 서풍을 수용한 뒤 이를 바탕으로 시원하고 깔끔한 자신의 서풍을 이루었다. 이 필적 역시 안진경, 하소기 서풍이 두드러진다.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공립公立, 호는 심전心田이다. 본명은 종식鍾植이고 아명으로 욱상昱相·旭相도 썼다. 1902년 조석진과 함께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 주관 화사로 활동하며 화명을 높였다. 1911년 서화미술회가 설립되자 화과畫科에서 그림을 가르쳤고, ‘경묵당耕墨堂’이라는 개인 화숙공간을 마련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안종원이 쓴 이 예서 필적은 묵암黙菴이 부탁하여 써준 것이다. 한대漢代 예서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청대 비학파碑學派 서예가였던 등석여鄧石如의 예서풍도 느낄 수 있다. 해서처럼 장방형의 자형을 취하고 있다. 江湖容我愚 甘作者農夫 跡脫千塵丈 心存山一區 著簑耕後圃 抛筆艱殘軀 嘯傲抱瓢臥 淸風度竹梧 강호가 나의 어리석음을 받아주었으니 달갑게 농부가 되리라 천 길 되는 세상 먼지 털어버리니 마음은 산자락 한 구역에 있다 도롱이 입고 뒷밭을 갈며 붓을 던지고 쇠잔한 몸을 견디네 구속 받지 않고 지내며 표주박을 잡고 누우니 시원한 바람이 대나무 오동나무로 불어오네
윤효정(尹孝定 1858~1939)의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운정雲庭이다. 경기도 양주 출신이며 1907년 오세창, 권동진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여 대한자강 회 사업을 계승하였다. 기관지인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대한민보大韓民報』를 간행하였다. 윤효정이 예서로 쓴 이 필적은 한漢 《장천비張遷碑》를 바탕으로 청淸 이병수(伊秉綬 1754~1815) 예서풍을 응용한 듯 보인다. 말미에 [운정雲庭], [윤효정인尹孝定印]이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이 필적은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1856~1932)이 집안의 가훈家訓으로 삼을만한 글귀를 쓴 것이다. 병풍의 제1폭과 제12폭 부분이며, 사공도司空圖의『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전아典雅」, 「기려綺麗」 등을 비롯하여 명明 서정경徐禎卿의 「월헌月軒」 등이 나머지 10폭에 구성되어 있다. 글씨는 명 동기창 서풍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특히 석운石雲 권동수(權東壽 1842~?)의 글씨와 매우 유사하다. 傳家禮樂宗東魯 經世文章齊盛唐 집안에 전하는 예와 악은 동쪽 노나라를 근본으로 삼고 세상을 경영하는 문장은 성당 시대와 같아야 한다.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본관이 반남潘南이고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초명은 무량無量이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으 며 12세 때 철종(哲宗 1831~1863)의 부마가 되어 금릉위錦陵尉 작위를 받았다. 개화사상가로 활동하였으며 서화에 조예가 깊어 행서와 초서 글씨를 주로 남겼다. 박영효가 행서로 쓴 칠언시는 청대淸代 이병수(伊秉綬 1754~1815)와 하소기(何紹基 1799~1873) 서풍이 드러난다.
구한말 정치가, 개화사상가로 활동한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의 행서 칠언시이다. 유길준의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이다. 유길준 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으며 저서로 『서유견문西遊見聞』이 있다. 중국 명말明末 청초淸初에 활동한 부산(傅山 1605~1684)의 광초서狂草書를 연상케 하는 원필세圓筆勢가 강조된 분방한 필치로 행서를 구사했다.
윤용구가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조용히 은거하는 삶의 기쁨을 읊고 쓴 행서 필적이다. 윤용구는 을미사변 이후로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였으며, 한일합방 후에도 관직을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娛하며 세사를 멀리하였다. 이 필적은 근대기에 자주 사용되었던 용, 봉황, 박쥐, 구름 무늬가 들어간 연홍색, 연청색 등의 색종이에 썼으며 총 10폭의 병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의 짝수 폭 마다 [윤용구인尹用求印], [해관海觀]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강약의 변화가 강하게 느껴지는 필치로 윤용구의 유창한 행서풍을 살필 수 있다.
윤용구가 행서로 ‘첨모재’라는 당호를 쓴 현판이다. ‘석촌노초石村老樵’라고 써 있어 노년에 쓴 필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윤용구는 금석문과 현판 글씨를 자주 썼는데 남양주 「임중선묘갈任中善墓碣」, 경기도 광주 「김자수신도비金自粹神道碑」와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이 전한다.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당唐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황보탄비皇甫誕碑』 일부를 임서한 서첩이다. 『황보탄비』는 수隨나라의 대신 황보탄皇甫誕을 위해 아들 황보무일皇甫無逸이 세운 비이다.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과 더불어 당대 서예를 배우는 기준 법서法書 중 하나이다. 윤용구가 구양순의 글씨를 바탕으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윤용구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해관海觀이다. 서화에 관심이 깊었으며 글씨로는 해서와 행서 작품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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