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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영(池雲英 1852~1935) 82세 때의 필적으로 송 소식의 「적벽부」를 10폭에 나누어 쓴 것이다. 지운영은 해서와 행서를 즐겨 썼는데 독특한 짜임과 발묵법을 운용하여 개성적인 행서풍을 구사했다. 이 필적 역시 행간과 자간을 자유롭게 운용한 특유의 서풍을 느낄 수 있다. 말미에 [지운영인池雲英印] [백련白蓮]이라는 낙관을 찍었다. 지운영의 호는 백련白蓮·설봉雪峰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글씨뿐만 아니라 산수화도 잘 그렸으며 1877년 강위姜瑋를 중심으로 청계천 광통교에서 결성된 중인들의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試士에 참여했다.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운 뒤 1884년 서울 마동에 사진관을 개설하여 최초로 고종어진을 촬영하였다. 1918년 결성된 서화협회 정회원이었고, 조선미술전람회 제1회, 제7회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정대유 행서의 전형을 알 수 있는 필적이다. 정대유는 아버지의 서풍을 그대로 이었고 세장細長한 짜임과 부드러운 필치의 행서를 주로 썼다. 견본 바탕에 쓴 필적으로 먹의 농담이 매우 자연스럽고 운필의 기량이 충만하다.
우향 정대유는 예서와 행서를 즐겼고 특히 간결한 필치의 매화와 괴석怪石 그림을 그렸다.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여 개최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朝 鮮美術展覽會 서부書部에 예서로 출품하였고, 그밖에도 서부와 사군자부의 심 사위원을 지냈다. 예서로 쓴 이 필적은 ‘천암天庵의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글 읽는 방’이라는 뜻이다. 천암이라는 사람에게 당호를 써준 것으로 보인다.
정대유(丁大有 1852~1927)의 자는 사유士有, 호는 우향又香·금성錦城,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정학교의 아들이며 숙부 정학수丁學秀도 화가이다. 근대기 미술교육기관으로 1911년 창립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에서 글씨와 문인화를 가르쳤다. 1918년 서화협회 창립 당시 발기인이었고, 1921년 3대 회장을 역임하며 첫 서화협회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이 작품은 첩의 제목처럼 정대유의 해서·행서·예서가 차례로 실려 있다. 먼저 해서는 당唐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일부를 임서했다. 이어서 송宋 미불米芾의 《서원아집도서西園雅集圖序》를 행서로 옮겨 썼으며 끝으로 송宋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을 한나라 조전비曹全碑 풍의 예서로 옮겨 적었다.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정치가, 개화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서화에도 관심이 깊어 행초를 쓴 필적과 그림도 전한다. 이 필적은 김옥균이 행서로 쓴 칠언시이다. 김옥균은 개화독립사상을 공부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이 글씨는 고려 말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가 지은 수행시修行詩를 쓴 것이다. 김옥균은 ‘해남목우자海南牧牛子’·‘고균 두타古筠頭陀’ 등 불교와 관련된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당 안진경 서풍과 청靑 하소기(何紹基 1799~1873) 서풍을 절충하여 쓴 듯 보인다. 말미에 ‘고백古柏 김옥균金玉均’이라 쓰고 [김옥균인金玉均印], [고균거사古筠居士] 낙관을 찍었다.
이용준(李用俊 1836~?)의 본관은 하음河陰, 자는 경범景凡, 호는 우관又觀이다. 부친은 이상익李尙益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시에 합격하였으며 역관 출신으로 한학漢學을 전공하였다. 관직으로는 동지중추부사, 숭정대부를 거쳐 1899년 종일품 중추원 의관에 올랐다. 이 필적은 이용준이 손님과 나눈 화답시를 행서로 쓴 것으로 여겨진다. 작품 말미에 ‘종일품 이용준필’이라고 되어 있어 1899년 64세에 쓴 필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학교 행서풍을 따른 필적이다. 始知昨來客 不迷訪主人 從一品李用俊筆 비로소 어제 찾아온 손님을 알았으니 헤매지 않고 주인을 찾았네 종일품 이용준 쓰다
운양 김윤식이 행서로 쓴 칠언시이다. 85세에 쓴 노년 필적이다. 북위 해서풍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절법折法을 응용하여 필획을 운용한 듯 하나 일부 글자에서는 과도함이 드러난다. 김윤식은 1918년 서화협회 창립 당시 명예부총재로 활동하였다. 말미에 낙관한 [운양雲養]은 흐리게 찍혀 다시 찍은 듯 여겨진다.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1874년 문과 급제 후 황해도 암행어사, 순천부사를 거쳐 중추원의장 등 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 『운양집雲養集』이 전한다. 이 필적은 김윤식이 1915년 81세에 쓴 행서이다. 북위 해서풍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살집을 덜어내고 완만한 속도의 필치로 썼다.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은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이다. 구한말 여러 요직을 맡았으며 대한협회 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한학과 글씨를 잘했는데 처음에는 이광사를 배우다가 뒤에는 부드러운 운필로 특유의 개성을 보였다. 이 필적은 육유(陸游 1125~1210), 한악(韓偓 842~923) 등 중국 문사의 시를 행초서로 쓴 것이다. 글자 크기와 자간, 행간에 구애받지 않은 방일한 장법을 구사하였는데 명나라 초서에 영향을 받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서풍이 드러난다. 8폭 병풍의 제1폭과 제2폭에 해당한다.
이 필적은 고전古篆 서체로 칠언대구를 쓴 것이다. 73세 계축년(1913)에 초향관주인艸香館主人을 위해 고전古篆을 집자集字했다고 썼다. 강진희(姜璡熙 1851~1919)는 1911년 설립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 서과書科 교원으로 전서, 예서, 문인화를 가르쳤다. 1918년 서화협회書畫協會가 창립되었을 때 13인의 발기인 중 한사람이었으나 이듬해 타계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운영에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名士慢磨龜石硯 貴人多佩虎符銅 이름난 선비는 느긋하게 귀석연(거북이 모양의 돌벼루)을 갈고 귀한 사람은 대다수 호부동(호랑이 모양의 구리 신표)을 찬다
유한춘(劉漢春 1848~?)이 종정금문과 와전명문을 임모한 뒤 석문을 쓴 것이다. 이러한 임모작은 명문의 내용이 장수·다복 등 길상적 의미를 지닌 것이어서 타인의 수복을 축원하는 용도로 널리 쓰였다. 유한춘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원거元擧, 호는 우관愚觀이다. 사자관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며 1876년(고종 13) 식년시에 합격, 천문학을 전공하였다. 형인 해관海觀 유한익(劉漢翼 1844~?)과 함께 사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형제가 모두 전서와 전각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권동수(權東壽 1842~?)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영致永, 호는 석운石雲이다. 구한말 활동했던 문신·서예가로 벼슬은 영사領事를 지냈다. 글씨는 안진경체를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전통을 이어갔으며 해서와 행서를 잘 썼다. 이 글씨는 소식(蘇軾1036~1101)이 지은 「서이세남소화추書李世南所畫秋」를 행서로 쓴 것이다. 북위 해서풍에 안진경체를 가미한 듯 보이며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필치다. 野水參差落漲痕 疎林欹倒出霜根 扁舟一棹歸何處 家在江南黄葉村 爲北原君正 石雲 權東壽 들녘 물 들쑥날쑥 불었던 자취 드러내고 성긴 가지 삐죽빼죽 서리에 뿌리 드러냈네 조각배 노 저어 어디로 돌아가나 우리 집은 강 남쪽 황엽촌에 있다오 북원군께서 바로잡아 주십시오 석운 권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