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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 등록일
-
2010.07.28
- 필자
- 이동근
- 시대구분
- 근대
-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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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은 본관이 전주 이씨로 덕원군 14대 손이며 호는 탄운(灘雲)이다. 1856년 2월 10일 남양군 팔탄면 가재리에서 이인규의 2남으로 태어났다. 19세 때 결혼한 뒤 향리에서 농업에 힘쓰는 한편 한학에 정진하였다. 그리고는 28세 때부터 인근 농촌을 순회하며 한학을 교육하는데 열중하였다.
33세 때는 조선의 궁내부 주사가 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농촌의 현실이 척박함을 인식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고자 먼저 인근 팔탄․향남․봉담․정남․우정․남양 등 7개 면에 한문서당을 세워 후진을 교육하고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서당 교육을 통해서 독립운동 동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3년을 못가서 망한다’는 뜻에서 ‘왜왕(倭王) 3년’이라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다가 일경으로부터 수차의 고문과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고종 황제가 일본의 음모로 독살된 것이라고 격분했으며, 인근 각지의 동지들로 하여금 밤마다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서울을 향해 ‘망곡제’를 드리게 하여 일경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63세가 되던 1919년 3월 20일 그는 서울의 동지에게서 전달 받은 독립선언문을 복사, 각지의 지도급 동지 800여명에게 전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이정근은 유학자로서 1919년 3월말 발안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의 3․1운동은 우정․장안면과 연계하고 있다. 사전에 수촌리의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 팔탄면 고주리의 김흥렬과 함께 유학자 이정근이 사전에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모의하였으며, 수촌리, 고주리, 제암리 주민들이 합세하여 발안 장터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발안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정근은 백낙렬, 김흥렬과 안정옥 등과 자주 만나 정국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도 거사할 것을 결정하고 제자들과 많은 지역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3월 31일 발안장터에는 1,000여명의 시위군중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날은 장이 열리는 날로 많은 사람들과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3․1운동 당시 많은 만세운동이 장터에서 벌어졌는데, 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고, 또한 자연스럽게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공유했던 곳이었다. 시위 군중들은 연설을 하고 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면서 길가의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졌다. 그리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더욱 더 큰 소리로 항일의 의지를 불사르며 만세를 불렀다. 긴급히 출동한 일제는 진압과정에서 경찰과 보병이 마구잡이로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정근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제자들에게는 장꾼들이 장짐을 펴지 못하게 하는 한편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들과 함께 발안장터가 떠나가도록 만세를 부르며 앞장섰다.
만세운동의 과정에서 거센 투석전이 벌어지고 이에 맞서 일제의 경찰과 보병은 군중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사격을 해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일제의 총탄에 시위 군중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결국 유학자 이정근도 일본 수비대장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정근은 당시 남자들에게 백립(白笠)이나 갓에 흰 천을 두르게 했는데, 이는 국상에 대한 권위와 함께 독립운동에 호응한다는 뜻이었다. 이 날 7개 면민 1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주동했던 이정근은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공인의 공적을 기려 1991년에 애국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현재 발안으로 들어가는 길목 한편에 그의 순절을 기리는 ‘탄운 이정근 의사 창의탑’이 세워져 있어 오늘의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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