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면옥(일명 홍면)은 송산면 사강리에서 태어났다.
송산면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1914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횡령죄로 징역을 산 적이 있으며, 1917년에는 인천지청에서 도박죄로 태형 30도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도박 및 횡령죄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식민지 지배 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던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서당에서 기본적인 한문을 공부했었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석방후에는 버들무지(비봉면 육포리) 및 송산면 육도리에 거주하며 살았다.
3․1운동 당시 35세였던 홍면옥은 3월 11일자 『매일신보』를 통하여 만세소식을 접하고, 조선은 원래 독립국이었으므로 당연히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면서 만세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다.
당시 수원군 송산면의 3․1운동은 홍면옥(일명 홍면)과 홍효선 등의 주도하에 적극적인 양상을 띠어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이들은 주변의 주민들을 구장집에 자연스럽게 모이게하여 3월 26일 홍명선의 집으로 호세를 납부하려고 모인 140여명에게 다른 마을에서도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으니 우리도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3월 26일 오후 5시경 송산면사무소로 몰려가 태극기를 게양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홍면옥과 홍효선 등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사강리 장날인 3월 28일 오전 10시~11시 사강장터 등지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오후 2시경 송산면사무소 뒷산 및 부근에서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시위군중은 1,000여명이나 되었다.
시위 군중들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운동이 확산되자 일본 순사들은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송산면사무소에 출장 와 있던 순사부장 노구찌(野口廣三)가 시위를 주동한 홍면옥 등 3명을 체포했고, 홍면옥이 저항하다가 순사가 발사한 총에 부상을 입었다. 이 모습을 본 시위 군중들은 격분하여 일본순사를 죽이라고 외쳐댔다. 이에 놀란 일본 순사 노구찌는 자전거를 타고 도망을 쳤고, 분노한 군중들은 도망치는 노구찌 순사를 뒤쫓아가 돌을 던져 자전거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자전거에서 떨어진 노구찌에게 수백명의 주민들이 다가가서 돌과 몽둥이로 가격하여 그 자리에서 순사를 처단했다.
만세운동의 과정에서 홍면옥은 일본순사 노구찌가 쏜 총을 어깨에 맞고 부상을 당한채 체포되었다.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된 뒤 1920년 징역 12년을 받고 10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송산면 육일리에서 한문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그의 항일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홍면옥은 해방 후 송산면 치안대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던 중 1949년경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