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 역사문화실에는 광교신도시 조성에 따라 출토된 발굴유물들과 도시변천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개발로 훼손되는 어메니티 자원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광교 역사문화실은 광교신도시가 선조의 숨결이 담긴 정취 있는 마을에서 역사ㆍ문화도시,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환경 생태도시로 새롭게 조성되어 희망과 기대가 아울러 공존하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현동 271-2 일대의 신석기시대 집터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토기의 모양은 바닥이 뾰족하며, 그릇 몸통의 지름보다 속이 깊다. 입술은 곧으며, 입술면은 편평하게 마무리되었다. 외면에서 빗살 같은 줄이 몸체 중반까지 새겨져 있다.
하동 622 일대의 삼국시대(백제) 집터에서 출토되었다. 단지의 몸통은 둥글며, 목 부분은 비스듬하게 좁아지다 밖으로 벌어진 입술과 이어진다. 몸통에는 가로세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이 되는 두들개 흔적이 있다.
원천동 산46 일대에서 출토된 이만화(1662~1708)의 청화백자 묘지이다. 묘지문墓誌文은 전前 공릉참봉恭陵參奉 윤관주尹觀周(1675~?)가 지었으나 글씨를 쓴 사람은 기록하지 않았다. 제작 시기는 1744년(영조 20)이다.
이만화는 정종定宗의 제10왕자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며 자字는 군실君實이다. 수원水原 장죽長竹에 거주하며 판서 한성우韓聖佑(1633~171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관직은 나가지 않았다. 사후 수성산隋城山 남리南里 신좌辛坐에 안장되었다.
김순金恂(1258~1321)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 문과 급제 후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使에 이르렀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수원시 광교신도시 안동김씨의 선조이다.
김순 묘지는 1943년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 있던 묘를 1943년 안양시로 이장할 때 출토되었다. 묘지문은 1321년(고려 충숙왕 18) 여흥군驪興郡 민지閔漬(1248~1326)가 글을 지어 앞뒤에 새겨 놓았으나 글씨 쓴 인물은 기록하지 않았다.
제액題額을 “고려국중대광상락군김공순묘지증시문영공高麗國重大匡上洛君金公恂墓誌贈諡文英公”이라고 큰 해서楷書 글씨로 쓴 후 본문은 작은 해서 글씨로 정성들여 썼다.
고신告身은 조선시대에 1~9품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 내용을 보면 ‘이조만력이년오월초육일吏曹萬曆二年五月初六日 봉교봉직랑행사간원정언겸춘추관기사관김찬위봉직랑행성균관전적奉敎奉直郞行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金瓚爲奉直?行成均館典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왕명을 받들어 눌암 김찬金瓚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김찬의 관직은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였다. 김찬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숙진叔珍이며, 호는 눌암訥庵이다. 조선 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金士衡의 7대손 참의공 김언침金彦沈의 셋째아들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장옷長衣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후 겉에 입는 조선시대 여성의 가장 대표적인 외출복이다. 이 유물은 소렴에 있었던 겹 장옷으로 녹색이 뚜렷이 남아있다. 겉감은 구름무늬의 문능紋綾이고 안감은 성근 주紬로 만든 겹옷이다. 섶선 안으로 들여 달린 목판깃과 겨드랑이 아래 사각접음무가 달린 것이 특징으로 길감과 다르게 자주색 연화문단으로 장식하였다. 겨드랑이에서 이어지는 소매는 일자형이며 소매 끝에 흰색 거들지를 달아주었다. 현재 고름은 소실되어 달려있지 않다.
치마와 저고리는 여성의 대표적인 옷이다. 저고리는 깃, 곁마기, 고름을 자주색으로 사용한 회장저고리 형태로 겉깃이 모두 목판당코깃(여밈 끝이 버선코처험 뾰족한 모양의 깃) 양식이다. 소매의 모양은 겨드랑이에서 소매로 완만하게 줄어드는 일자형이며, 길(몸통) 부분의 옆선과 도련은 완만한 곡선이다.
전시된 치마 겉감은 화문단, 안감과 허리말기는 성근 명주로 만든 겹치마이다. 17세기에는 여성이 치마 위로 저고리를 입었을 때 치마 허리말기가 살짝 덮히는 정도로 입었다.
소강실에서는 대한민국 스포츠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근대 체육의 도입과 우리 삶 속에 스며든 다양한 스포츠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올림픽, 아시아 경기대회 등 온 국민을 열정으로 뭉치게 했던 스포츠 행사 자료 등을 소개합니다. 특히,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소강 민관식(1918 ~ 2006)이 기증한 1988년 제 24회 서울올림픽 성화봉을 포함한 스포츠 관련 자료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소화 9년(1934) 추계운동회 안내장이다. 수원공립보통학교장 답명태삼(沓名泰三)의 이름으로 발송되었다. 1929년 대운동회 안내장과 유사하며 군국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다. 운동회장 밖에 직업과 상업실습부의 판매대를 설치하여 이용을 권장하고 있다.
태극마크 아래 오륜기가 붙여진 형태의 대한올림픽 위원회 마크이다. 1946년 조선올림픽위원회로 창설되어 1947년 제40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964년 대한체육회에서 분리되어 독립사단법인체제로 활동하였으니 1968년 체육단체 일원화 시책에 따라 대한체육회 산하기구로 편입되었고 대한체육회장이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2009년 6월 대한체육회로 통합하였다.
상훈법에 따라 1973년부터 수여된 1등급 체육훈장을로 체육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체육 위상을 높이고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인물에게 수여한다. 민관식은 1989년 수상하였으며 손기정, 거스 히딩크, 최경주, 김연아 등이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체육계 최고명예 훈장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제작한 청동투구 복제품이다. 서울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할 목적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 부상품으로 받았던 청동투구를 복제하였다.
높이 505mm에 황동과 구리로 만들어진 서울올림픽 성화봉은 동서화합을 내세운 올림픽을 표현하기 위해 성화봉 상단 화로 부분에 동양과 서양을 나타내는 두 마리 황룡이 새겨져 평화와 젊음을 상징한다. 화로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디자인에 전통 문양을 조합하였고 윗 부분에 24개의 구멍을 뚫어 24회 서울대회를 상징하고 있다. 숙명여대 우이성 교수가 디자인하였다.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는 평창 해발고도 700m를 상징하는 700mm 높이에 우리나라 겨울철 강풍과 폭설 등 날씨를 고려해 다양한 환경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을 유지하도록 제작했다. 회전하며 상승하는 불꽃형상과 전 세계 5대 대륙을 하나로 이어주는 올림픽 정신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전통 백자에서 모티브를 얻은 성화봉은 겨울스포츠를 상징하여 흰색을 사용했고 손잡이 부분에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은 디자인 패턴을 활용하여 전 세계인이 함께 어울리는 '하나 된 열정'이라는 뜻을 담았다. 이노디자인 김영세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광교박물관 소장 성화봉은 평창동계올림픽 수원구간 성화 봉송자였던 자원봉사자 이순남님 기증품이다.
2002 한일월드컵 본선진출 32개국 기념품 액자이다. 동그란 모양에 ‘2002 FIFA WORLD CUP’ 영문을 돌려 새기고 가운데 각국 국기를 표현하였다. 국기 아래쪽에 해당 나라이름을 넣어 A조부터 H조까지 조별 국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88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로고, 올림픽 로고, 'Korea Olympic Committee'이 새겨져 있다. 아랫쪽 왼쪽과 오른쪽에 선수들의 사인을 새긴 동판이 배치되어 있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최초 남북단일팀 '코리아팀'이 참가한 국제대회다. 현정화, 이분희 등이 주축을 이뤄 여자 단체전에서 코리아팀으로 우승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한반도기는 이후 남북단일팀 상징이 되었다.
1992년 2월 19일 발효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발효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합의서는 4장 총25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1991년 남북고위급회담 남측 수석대표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 북측대표단 단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연형묵의 이름으로 합의된 사항이 1992년 발효된 것을 기념하였다.
사운 이종학(1927 ~ 2002)은 왜곡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근거 없는 주장을 일삼는 주변국으로부터 우리 역사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사료 수집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역사왜곡에 대한 일시적 분노나 외침이 아니라 객관적인 역사 자료를 통해 진실을 밝혀내 허구적인 주장에 대응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지도와 고서 등에 나타난 소중한 우리 영토에 대한 기록, 일제에 의해 자행된 침탈 관련 자료들이었고, 그는 자료 수집을 통해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이순신과 관련된 사료, 정조와 수원화성에 대한 자료는 물론 선조들의 뛰어난 문화와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유물을 모아 관련 기관에 기증하였습니다.
이종학의 사료 수집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가 저술한 『삼국통람도설 三國通覽圖說』에 수록된 부속지도 5장 중 하나이다. 지도에서 이야기하는 세 나라는 조선(朝鮮), 유구(琉球, 지금의 오키나와지역), 하이(蝦夷, 아이누족이 살던 홋카이도 이북 지역)로 나라별로 채색을 달리하여 국경과 영토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은 흰색, 일본은 회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동해바다 한가운데 큰 섬(울릉도) 하나와 그 오른쪽에 작은 섬(독도) 하나를 붙여 그렸습니다. 이 섬들은 모두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왼쪽 큰 섬에는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한 다음 그 아래에 "朝鮮ノ持之(조선이 소유하고 있다)"와 "此島ヨリ隱州ヲ望又朝鮮ヲモ見ル(이 섬에서 은주가 보이고 또 조선도 보인다)"라고 기록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으로 총 14권 8책이다.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으로 교서관校書館에 이를 관장할 국局을 설치하고, 이순신의 유고와 관계 문건을 망라해 규장각검서 유득공柳得恭(1748~?)의 감독아래 편집, 간행되었다.책머리에 정조의 윤음綸音을 비롯하여 교유敎諭·사제문賜祭文·도설圖說이 실려 있고, 이순신의 세보世譜·연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장계狀啓·난중일기亂中日記를 포함하여 이순신의 비문·기문記文·제문 등이 남겨져 있다.특히 권수 「도설」에는 통제영귀선統制營龜船, 전라좌수영귀선全羅左水營龜船을 그린 그림이 수록되어 있어 거북선의 구조를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순신 개인의 일대기적 자료로써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사회상 연구에도 꼭 필요한 기록이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사보고서이다. 내용은 총론, 경제사정, 부락의 특성, 생활양식, 문화사상, 생활상태, 농가의 수기, 지도, 사진 등으로 이루어졌다. 총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일제는 경제조사를 근간으로 하여 식민지 조선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원군을 비롯한 조선의 대표적 시·군을 대상으로 이러한 작업을 지속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의도에서 관습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 1906년 통감부 설치와 함께 각종 제도와 법률 정비에 착수하였고, 이는 식민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철저한 준비 작업이였으며, 일제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조선에 대한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식민통치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종학은 친족ㆍ상속ㆍ유언 등에 관한 민법조사, 상행위ㆍ회사ㆍ해상 등에 관한 상법 조사, 지명유래 등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다양한 분야에 걸친 보고서 750점을 기증하였다. 현재 일제의 관습조사보고서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와 미국 하와이대 서대국 교수가 수집한 자료등이 알려져 있는데, 이 중 이종학 수집 관습조사보고서가 양적ㆍ질적으로 단연 앞선다.
간도지역의 인문ㆍ자연환경을 간단히 소개하는 개요서다. 앞면에는 간도지역의 위치ㆍ지세ㆍ면적ㆍ기후ㆍ인구ㆍ산업ㆍ교통ㆍ금융ㆍ종교ㆍ관할도읍 등에 대한 정보가 있고 뒷면에는 간도지역의 주요산업시설 및 철도노선이 그려져 있다.
1794년(정조 18) 1월부터 1796년(정조 20) 9월까지 진행된 화성성역의 전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1801년 9월 금속활자인 정리자본整理字本으로 간행되었다. 총 9책으로 구성되었으며, 화성성역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담겨져 있는 종합보고서로 당시의 건축기술 뿐만 아니라 경제·사회·문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종학은 ‘화성’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자 『화성성역의궤』를 영인하여 국내 주요 기관과 연구자는 물론 해외 각국의 문화재 관련기관에 배포하였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실사단에 기증하여 건축물의 우수성과 기록물의 우수성을 함께 인정받으며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수원농림학교가 1922년 조선총독부 수원고등농림학교로 변경된 이후 발간된 학교 요람이다. 학교의 다양한 정보를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별첨으로 평면도가 들어 있다. 수원고등농림학교는 1904년 개편된 농공상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906년 농상공부 소관 농림학교로 분리되었고 이후 권업모범장이 수원에 설치되면서 1907년 농림학교는 수원 서둔촌으로 이전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 부속 농림학교가 되었고, 1918년 수원농림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이후 1922년 조선총독부 수원고등농림학교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