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 새로운 고향, 신풍新豐 즉위와 동시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표방한 정조대왕은 재위 9년만인 1789년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이를 보호하고자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였다. 이후 정조대왕은 매년 사도세자 묘소를 찾을 때마다 머물 수 있는 화성행궁을 조성하였다. 수원을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고사 ‘풍패지향(豐沛之鄕)’에 비유하여 자신의 새로운 고향이라 일컬으며 화성행궁의 정문을 신풍루라 이름하였다. 2. 조선 최대의 행궁 조성 왕이 도성에서 나라를 다스리며 사는 곳을 궁궐이라 한다. 궁궐에도 종류가 있는데 정무(政務)를 보며 각종 의식(儀式)을 치루는 정궁(正宮)과 법궁(法宮)이 있고 거둥때 머무르던 이궁(離宮), 별궁(別宮). 행궁(行宮)이 있다. 특히 왕이 도성을 벗어나 임시로 머물던 곳을 행궁이라 하였다. 대표적인 행궁으로 태조의 고향에 있던 함흥본궁, 온천 치료하던 온양행궁, 피난 가던 남한산성행궁과 북한산성행궁 등이 있다. 그리고 능행차 때 이용하던 과천행궁, 시흥행궁, 화성행궁 등이 있다. 1789년(정조 9)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매년 묘소를 찾을 때마다 머물 수 있는 궁궐을 수원에 조성하였다. 바로 600여칸에 달하는 조선 최대 규모의 화성행궁이다. 화성행궁은 도성의 궁궐 못지않은 정통 궁궐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정조가 1804년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장차 여기에 머물고자 계획하였기 때문이다. 3. 복합기능의 공간, 화성행궁 정조는 1790년부터 13차례나 수원으로 행차하였다.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궁중잔치와 다양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행사마다 백성들도 함께하는 ‘여민동락’의 잔치였다. 후대 왕들도 수원에 오면 이곳에 머물렀다. 평상시 화성행궁은 수원의 지방관리들이 집무하는 관아로 사용되었다. 곧 지방수령이 행정력을 발휘하는 통치의 공간이었다. 1793년 승격된 수원유수부의 장관인 수원유수는 행궁정리사 겸 장용외사로서 지방행정과 군사 지휘권을 갖는 막강한 지위에 있었기에 화성행궁은 그 위상이 남달랐다. 화성행궁은 왕의 행차에 따른 다양한 왕실행사의 공간이자, 수원유수의 지방행정 및 군사 지휘 공간으로 사용된 복합기능의 공간이었다. 4. 화성행궁의 훼손과 복원 화성행궁은 600여칸으로 조선시대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일제강점기때 군청, 경찰서, 의료원 등이 들어서면서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사라졌다. 엄청난 훼손을 당했지만 20여년전 뜻있는 수원시민들이 화성행궁 복원에 힘을 모아 발굴조사를 거쳐 1996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수원화성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이제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거듭났다. 5. 에필로그 : 여민동락의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