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1735년 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왕을 대신해 정사에도 임하였다. 그러나 영조와의 갈등과 정치적 파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1762년 영조의 명에 의해 생을 마감하며 왕세자의 지위도 박탈당했다. 그 아들인 정조는 즉위하면서 곧바로 만천하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표방하고 생부의 추숭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사도세자의 생애와 정조의 추숭사업을 통하여 현륭원 조성과 아울러 신도시 수원 건설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왕릉에 버금가는 현륭원 조성 정조는 재위 13년만인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를 현륭원으로 옮겨 모시고 이를 보호하고자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였다. 현륭원은 세자를 모신 원소(園所)임에도 정조의 지극한 효심으로 인해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당시 조선의 문화 역량을 총동원해 왕실 능원(陵園) 조성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석물 조각 수준도 매우 뛰어나 조선후기를 대표할 만큼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또한 정조는 파격적으로 자신의 어진(御眞)을 현륭원 재실의 어진봉안각(御眞奉安閣)에 두어 하루도 빠짐없이 배알하겠다는 효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3. 조선 왕실의 현륭원 참배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수원에 처음 행차하였다. 양주 배봉산에 모신 사도세자를 수원부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모든 일을 직접 관장하기 위함이었다. 지극한 효심으로 새롭게 조성한 현륭원에 나아가 직접 지문을 지어 올리고 사도세자의 영면을 기원하였다. 이때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정조는 12년간 13차례나 수원으로 행차하여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특히 1795년에는 회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여동생들과 함께 수원으로 행차하여 더욱 의미가 컸다. 혜경궁홍씨는 이때 현륭원을 처음 참배하였다. 사도세자 역시 살아 있었으면 회갑이었다. 정조는 두 분을 위해 화려한 회갑연과 다양한 행사를 펼치며 백성들도 함께 참여하는 축제의 장을 마련하였다. 이렇듯 정조의 현륭원 참배는 더 이상 슬픔의 길이 아닌 왕실과 백성이 모두 어우러지는 ‘여민동락’의 축제를 위한 길이었던 것이다. 4. 국왕의 수레가 머무는 땅, 수원 정조대왕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 후대 왕들도 현륭원 참배를 위한 수원 행차를 이어 갔다. 후대 왕들은 모두 15차례에 걸쳐 수원으로 행차하여 사도세자 현륭원과 정조대왕 건릉을 참배하였다. 정조대왕 이래 지속된 왕들의 행차에서는 특별히 수원지역 선비들과 무인들을 대상으로 특별시험을 시행하거나 수원지역 백성들에게 쌀을 내리는 등의 각종 특혜를 베풀었다. 이는 정조대왕이 생전에 “국왕의 수레가 머무는 땅에는 반드시 백성들에게 은택을 널리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유지를 계승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