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박물관] 화성문화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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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차와 군사 개혁의 핵심인 장용영을 보여주는 공간

수원화성박물관 화성문화실

화성문화실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잔치를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화성에서 거행함으로써 드러냈던 부모에 대한 효, 왕조의 권위회복 그리고 애민정신을 살필 수 있습니다.
왕권강화를 위해 창설된 장용영 군사들의 무기와 무예, 서북공심돈에서의 가상전투 장면을 통해 수도 남쪽을 방어하는 수원화성의 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 추숭과 수원부 읍치 이전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조선 22대 임금 정조대왕은 흔히 탕평군주이자 호학군주라고 일컬어집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왕세자인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하고, 사도세자의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화산 아래에 있던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여 행궁을 짓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호학군주로서 정조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100책에 이르는 문집을 통하여 왕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관련 유물을 통하여 왕세자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으며, 더불어 현륭원 천봉과 용주사 창건과 같은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조의 화성행차와 혜경궁홍씨 진찬연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13번이나 현륭원 참배를 위하여 행차하였으며, 그중에서 1795년(을묘)은 8일간이나 화성행차를 하며 다양한 궁중연회와 행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때 정조는 현륭원 참배와 함께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60세 환갑잔치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개최하였고,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거나 과거시험을 보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연이어 개최하였습니다.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와 봉수당 진찬연의 모습 그리고 화성성역의 총리대신이자 을묘년 원행의 총호사를 지낸 번암 채제공의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

정조는 1785년 왕권강화와 국왕 호위를 위하여 장용위의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1793년 장용영을 창설하였습니다. 장용영은 크게 도성 중심의 내영과 수원 중심의 외영으로 구성되었고, 외영의 지휘관인 장용외사(將勇外使)는 수원유수가 겸직하였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의 호위와 화성축성 후 신도시 수원의 방어를 목적으로 내영보다 외영에 더욱 치중하여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로 성장하였습니다. 장용영의 창설과 수원유수부의 방어체제를 살피고, 장용영 관련 문서와 군사훈련 병법서 및 병장기 그리고 수원출신 무관 등을 통하여 장용영의 실체와 수원화성의 방어 기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시유물 보기

  • 봉수당진찬도 奉壽堂進饌圖

    1795년(을묘년) 윤2월 13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펼쳐진 혜경궁 홍씨의 성대한 회갑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도성을 벗어난 최초의 왕실 잔치가 행해진 을묘년 수원행차의 핵심 행사를 묘사한 궁중 기록화다. 국내 몇몇 기관에 남아 있는데, 이 그림은 일본 쿄토대학교 종합박물관의 소장본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복제한 국내 유일본이다. 봉수당에 준비된 혜경궁 홍씨와 내외명부의 자리는 특별히 주렴으로 가려져 있다. 주렴 바로 앞 향로가 올려진 탁자 아래쪽에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절을 올리는 배위拜位가 마련되어 있고 배위 좌측으로는 병풍이 세워진 안쪽에 정조의 자리임을 알려주는 호피虎皮 보료 방석이 깔려있다. 봉수당 앞뜰에 마련된 임시 야외 무대에는 흰색 휘장을 둘렀고 행사 관계자의 출입이 용이하도록 계단도 3개 설치하였다. 무대 중앙에는 무녀들의 회갑 축하 공연이 묘사되어 있다. 그 우측과 좌측에는 왕실의 친인척이 배석하였고, 무대 끝에는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을 비롯한 연주대가 위치해있다. 무대 아래의 삼문(중양문) 밖에는 융복 차림의 여러 신하들도 묘사되어 있다.

  • 채제공초상 시복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1791년 채제공 73세 때에 그린 초상화로, 화사 이명기가 41세의 정조 어진을 그린 후 정조의 명을 받아 그렸다. 초상화는 번암이 오사모에 분홍빛 단령을 입고 화문석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좌측 눈의 사시 기운까지 표현되고 있는 점에서 매우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좌측에는 ‘임금이 하사한 부채와 선추는 물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군주의 은혜’라고 감격하는 번암 자필의 찬문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중 독특하게 손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정조의 하사품인 부채를 드러내 보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 전령 傳令

    정조는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로 이장하고 1793년(정조 17) 장용영壯勇營을 내외영으로 구분하여 수원부에 외영外營을 신설하며 수원을 친위지역화하기 시작하였다. 1793년 1월 12일 정조는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키며 유수가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직하게 하는 직제개편을 단행하였다. 이 전령은 바로 이날 수원유수에 제수된 채제공에게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임명한 것이다. 문서의 좌측 상단에는 정조의 수결이 있고, 인장은 ‘시명지보施命之寶’를 날인하였다.

  • 고풍

    고풍(古風)은 왕과 함께 활쏘기에 참여한 신하들이 축하하는 의미로 왕의 활쏘기 곧 어사(御射)의 점수를 기록해 올리면 이에 왕이 특별히 내려주는 선물을 적은 문서다. 고대로부터 활쏘기 행사 후 고풍을 주는 것은 왕이 내리는 혜택이자 무예를 권장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풍습을 되살려 무예를 권장한 정조는 활쏘기를 자주 시행해 그의 재위 기간에 고풍이라는 문서가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1795년(정조 19) 수원행차 때는 9차례나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고 고풍을 내렸다고 한다. 정조는 장용영 관원 등의 무인들뿐만 아니라 문인들도 참여시키는 활쏘기를 시행해 무예를 장려하였다. 전시된 고풍은 장용영 관원이었던 오의상(吳毅常)이 받은 것이다.

  • 환도와 보검

    환도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단병기다. 칼집에 고리 모양의 ‘띠돈’이 달려있어 차고 다닐 수 있는 도검으로, 고리 ‘환(環)’자를 따서 환도(還刀)라고 한다. 환도는 중국이나 일본의 칼보다 짧으며 기본적으로 한손으로 사용하지만, 양손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도 많았다. 전시된 도검들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장용영 군사들도 이와 같은 도검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대모백은장 옥구보도’는 매우 희귀한 유물로, ‘대모’란 바다거북의 등껍질로, 칼집과 손잡이를 대모로 마감하여 제작한 환도이다. 은과 백옥으로 장식했으며, 칼자루에는 중간에 매듭을 매어 술을 달아 놓아 격식을 높였다. 철종 어진에 그려져 있는 칼과 비슷한 형태인 것을 봤을 때, 왕족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소유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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