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박물관] 야외전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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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기관과 문중으로부터 기증받은 유물과 수원 관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물을 옮겨와 전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수원에서 관리를 지낸 인물들의 업적을 나타내는 선정비, 의장석물, 묘제석물, 생활 유물 등이 야외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시민들이 익숙하면서도 잘 몰랐던 석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는 교육의 장으로서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역사적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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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비

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송덕비는 수원부사, 수원유수, 관찰사, 판관, 중군 등 수원을 다스렸던 관리의 업적과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불망비(不忘碑), 청덕애민선정비(淸德愛民善政碑),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지만 그 뜻은 모두 동일하다. 원래 수원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노송지대에 모아 두었다가 개관 시점에 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되고 있다. 당대 수원지역의 인물과 업적을 파악할 수 있는 금석학적 가치와 함께 시대에 따른 비석의 양식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 수원시에서는 송덕비 37기를 향토유적 제3호로 일괄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수원박물관에 27기, 수원화성박물관에 10기를 전시 중이다.

이시백(李時白) 선정비 [1581~1660]

조선중기 효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조암(釣巖)이다.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녹훈되었다. 1624년(인조 2)부터 1629년까지 수원도호부 부사로 재임하였다. 후에 병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이 비는 1629(인조 7)년에 세웠다.

인후(具仁垕) 선정비 [1578~1658]

조선중기 효종대 무신으로 본관은 능성(綾城), 호는 유포(柳浦)이다. 1603년(선조 36)에 무과에 급제하고 1635년(인조 13)부터 1637년까지 수원도호부 부사로 재임하였다. 정묘호란 때 후금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위하였다. 이 비는 1638년(인조 16)에 세웠다.

임의백(任義伯) 선정비 [1605~1667]

조선중기의 효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금시당(今是堂)이다. 1649년(인조 27)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0년(현종 1) 4월부터 11월까지 수원도호부 부사로 재임하였다. 그 후 평안도관찰사,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 비는 1662년(현종 3)에 세웠다.

민진원(閔鎭遠) 선정비 [1664~1736]

조선후기 숙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단암(丹巖)이며 인현왕후의 오빠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1701년(숙종 27)부터 1703년까지 수원도호부 부사로 재임하였다.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단암주의(丹巖奏議)』, 『연행록(燕行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 비는 1704년(숙종 30)에 세웠다.

이상진(李尙眞) 불망비 [1614~1690]

조선중기 숙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만암(晩庵)이다. 1645년(인조 23)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71년(현종 12) 1월부터 10월까지 수원도호부 부사로 재임하였다.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이 비는 1705년(숙종 31)에 세웠다.

권상유(權尙遊) 선정비 [1656~1724]

조선후기 숙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구계(癯溪)이다. 1694년(숙종 20)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03년(숙종 29)부터 1704년까지 수원도호부 부사로 재임하였다. 후에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이 비는 1705년(숙종 31)에 세웠다.

김시근(金蓍根) 불망비 [1755~?]

조선후기 철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흥지(興之)이다. 1802년(순조 2)에 병과로 급제하고 1820년(순조 20)부터 1822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다. 유수 재임시절 정조천릉도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비는 1822년(순조 22)에 세웠다.

남병길(南秉吉) 선정비 [1820~1869]

조선후기 철종대 대표적인 천문학자로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육일재(六一齋) 또는 혜천(惠泉)이다. 1850년(철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63년(철종 14)부터 1865년(고종 2)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다. 『시헌기요(時憲紀要)』, 『추보첩례(推步捷例)』 등 여러 천문관련 책을 남겼다. 이 비는 1865년(고종 2)에 세웠다.

정기명(鄭基命) 선정비 [1819~?]

조선후기 고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팔(舜八)이며 흥선대원군의 조카이다. 1853년(철종 4)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흥선대원군 집권 때 6조의 판서를 지냈다. 1869년(고종 6)부터 1871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고,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이 비는 1871년(고종 8)에 세웠다.

송근수(宋近洙) 불망비 [1818~1903]

조선후기 고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입재(立齋) 또는 남곡(南谷)이다. 1848년(헌종 14)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874년(고종 11)부터 1876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다.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라는 저서가 있다. 이 비는 1882년(고종 19)에 세웠다.

구완식(具完植) 불망비 [1825~1891]

조선후기 고종대 무신으로 본관은 능성(綾城), 호는 미산(渼山)이다. 1851년(철종 2) 알성(謁聖) 무과에 급제하여 1881년 어영청(御營廳) 중군(中軍)을 지냈고, 1882년(고종 19)부터 1884년까지 수원영 중군으로 재임하였고 후에 병조참판, 어영대장 겸 금위대장을 역임하였다. 이 비는 1885년(고종 22)에 세웠다.

정기세(鄭基世) 선정비 [1814~1884]

조선후기 고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주계(周啓)이다. 1837년(헌종 3)에 정시 병과에 급제하여 1879년(고종 16)부터 1882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다. 강화유수, 전라도관찰사, 병부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 비석은 1888년(고종 25)에 세웠다.

윤자덕(尹滋悳) 불망비 [1827~1890]

조선후기 고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국헌(菊軒)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여, 1887년(고종 24)부터 1889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다. 이조판서, 통리기무아문당상, 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비는 1890년(고종 27)에 세웠다.

이헌직(李憲稙) 선정비 [1839~1907]

조선후기 고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문우(文愚)이다. 1875년(고종 1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5년(고종 22)부터 1887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고, 병조정랑과 도총관, 전라감사, 봉상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 비는 1891년(고종 28)에 세웠다.

김홍집(金弘集) 선정비 [1842~1896]

조선말기 개화파의 거두로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도원(道園)이다. 1867년(고종 4) 문과에 급제하여, 1880년 예조참의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889년(고종 26)부터 1890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다. 비는 1892년(고종 29)에 세웠다.

민영상(閔泳商) 불망비 [1829~1901]

조선후기 고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與興), 자는 이경(伊卿)이다. 1872년(고종 9) 문과에 급제하여 1891년(고종 28)부터 1893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다. 이 비는 1893년(고종 30)에 세웠다.

윤영신(尹榮信) 불망비 [1831~?]

조선말기의 고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공실(公實)이다. 1864년(고종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90년(고종 27)부터 1891년까지 수원유수로 재임하였다. 이 비는 1893년(고종 30)에 세웠다.

이재극(李載克) 선정비 [1864~1927]

조선말기의 관료로 왕실 종친이다. 1893년(고종 30) 문과에 급제 후 1900년 1월부터 10월까지 경기도관찰사로 재임하였다. 후에 법부대신,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이 비는 1901년(광무 5)에 세웠다.

의장석물은 신도비(神道碑), 묘갈(墓碣), 묘표(墓表) 등의 묘비(墓碑) 종류와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동자석인(童子石人) 등의 석인(石人) 종류 그리고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양석(羊石), 마석(馬石) 등이 있다. 모두 위의(威儀)를 갖추어 피장자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냄은 물론 조형성과 기능성을 두루 겸비하여 묘를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 역할도 하였다. 수원박물관에는 의장석물 중 묘표와 석인 종류 그리고 망주석 등이 주로 전시되고 있다.

묘표

묘에 세우던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묘비이다. 앞면에는 묘주 성명과 관직을 뒷면에는 음기(陰記)나 건립연대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었다.

황사충(黃事忠) 묘표

황사충은 성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영희정 황희(黃喜)의 손자이자 호조판서 황치신(黃致身)의 아들이다. 관직에 진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479년(성종 10)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역임하였다.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표 뒷면에 건립 기사가 일부 나타나 있으나, 연호가 마모되어 절대 연대는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정이손(鄭二孫) 묘표

정이손은 조선 초의 문신이다. 고려 때 보승낭장전력부위(保勝郎將展力副尉)를 지낸 정주(鄭珠)의 증손이자 신호위(神虎衛)에 봉직했던 정종(鄭從)의 손자이며 성균(成均) 생원(生員) 정오(鄭悟)의 차남이다. 관직은 연풍현감(延豊縣監)을 역임하였으나, 자(字)와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표는 방부하엽(方趺荷葉) 양식을 갖추어 16세기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오(鄭悟) 묘표

정오는 조선초의 인물로 신호위(神虎衛)에 봉직했던 정종(鄭從)의 아들이다. 성균(成均)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자(字)와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표는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을 갖추고 있다. 뒷면에 기록된 음기(陰記)는 마모되어 판독하기 힘든 실정이나 건립연대가 “萬曆四十年閏十一月 日立”으로 확인되어 1612년(광해군 4)에 건립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정수(鄭琇) 묘표 [1578~1630]

정수는 인조대의 문신으로 자는 여실(汝實)이다. 성균(成均) 생원(生員) 정오(鄭悟)의 5세손이자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정희봉(鄭姬鳳)의 아들이나 백부(伯父)인 홍주목사(洪州牧使) 정희룡(鄭姬龍)의 계자(系子)로 입후(入後)되었다. 건립연대는 1680년(숙종 6)이다.

박종식(朴宗植) 묘표 [1682~1732]

박종식은 영조대의 인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석지(碩之)이다. 증군자감정(贈軍資監正) 박응신(朴應信)의 손자이자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박장명(朴長命)의 아들이다. 두 번 혼인을 하였는데, 첫번째 부인은 통덕랑(通德郞) 김대범(金大範)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두번째 부인은 학생(學生) 이귀운(李貴雲)의 따님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이다. 완산이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인 박충겸(朴忠謙)이 훗날 고위 관직에 오르게 되어 사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다. 묘표는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을 갖추어 1788년(정조 12)에 건립하였다.

박종식 계배 완산이씨(朴宗植 繼配 完山李氏) 묘표 [1685~1733]

완산이씨는 박종식의 두번째 부인(繼配)으로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만재(朴萬載)이고 차남(次男)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박만복(朴萬福)이다. 이중 장남인 박만재가 귀하게 되어 완산이씨는 사후 정부인(貞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박종식 묘표와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

황사충(黃事忠) 묘표

황사충은 성종대 문신으로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영희정 황희(黃喜)의 손자이자 호조판서 황치신(黃致身)의 아들이다. 관직에 진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479년(성종 10)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역임하였다.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표 뒷면에 건립 기사가 일부 나타나 있으나, 연호가 마모되어 절대 연대는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문석인(文石人)

문관(文官) 형상의 석인으로 시기에 따라 복두공복(㡤頭公服)이나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하였으며 ‘문인석’으로도 불리 운다. 묘주를 시위(侍衛)함과 동시에 벽사(辟邪)의 역할도 하였다. 동자석인(童子石人)을 비롯한 23기가 전시되고 있다.

망주석

무덤을 꾸미기 위해 세우던 돌기둥으로 일명 화표주(華表柱)라고 부른다. 멀리서도 묘를 쉽게 알아보기 위한 표지석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수원박물관에서는 현재 16기를 전시하고 있다.

묘제석물은 묘에서 지내는 제사와 직접 관련된 석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고석(鼓石), 향로석(香爐石), 제주병석(祭酒甁石), 촉대석(燭臺石) 등이 있다. 의장석물에 비해 규모도 작고 장식도 거의 없어 설치하는데 경제적 부담이 덜하였으므로 사대부 묘에는 거의 설치되었다.

혼유석(魂遊石)

혼유석(魂遊石)

제사 때 축문을 읽어 불러온 혼(魂)을 머물며 하는 석물이다. 규모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방형(方形)으로 조성한다. 심대생 묘 혼유석을 비롯한 5기가 전시되고 있다.

상석(床石)

상석(床石)

묘에서 각종 제사를 지낼 때 제물(祭物)을 올려놓는 석물이다. 앞면이나 좌우측면 에는 문양을 간혹 장식하기도 하고, 피장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글자를 쓰기도 한다. 대개 방형으로 만든다. 현재 박물관에는 15기를 전시하고 있다.

고석(鼓石)

고석(鼓石)

상석의 밑바닥을 받치는 석물이다. 외형이 북을 닮았다하여 북석, 북돌이라고도 불렀으며 족석(足石)이라고도 호칭하였다. 표면에 나어두(羅魚頭)나 원형 문고리 문양 등을 조각한다. 현재 9기가 고석이 전시되고 있다.

향로석(香爐石)

향로석(香爐石)

제사용 향로(香爐)를 놓는 석물이다. 4각, 6각, 8각 등 그 종류가 다양한데 겉모습은 향로와 거의 비슷하다. 시기에 따라는 상석받침석과 일체형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독립형, 일체형 합해 19기가 전시되고 있다.

촉대석(燭臺石)

촉대석(燭臺石)

제사용 촛대를 올려놓는 석물이다. 상석이나 향로석의 좌우에 설치하며 형태는 다양하다. 현재 1기를 전시하고 있다.

이목동 석곽묘(石槨墓)

이목동 석곽묘(石槨墓)

석곽묘는 일명 ‘돌덧널무덤’이라고도 부르는데,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자연 할석이나 자갈돌을 쌓아 직사각형의 공간을 마련한 무덤이다. 여기에 시신을 직접 묻거나 목관에 넣어 매장한 후 판돌이나 나무를 이용해 뚜껑을 덮었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석곽묘는 수원 이목동에서 발굴한 것을 옮겨온 것으로 수원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의 석곽묘이다. 머리 받침석이 있고, 회청색의 연질 완과 연황색의 연질 대부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괴목정교 표석(槐木亭橋 標石)

괴목정교 표석(槐木亭橋 標石)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하면 1796년(정조 20) 정조가 수원 현륭원의 행차길 중요지점마다 표석을 세우라는 내용이 있다. 총 18개의 표석을 세웠었는데, 현재는 괴목정교(槐木亭橋),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안녕리(安寧里), 만년제(萬年堤) 등 5개가 남아 있다. 2009년 5월 관리가 어렵고 훼손의 위험이 있어 수원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수원시 화서동에서 2008년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온 석불로 근래까지 동래정씨 집안 여인들에 의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의가 이루어졌었다. 삼존상으로 본존불과 좌우협시 보살입상으로 구성되었으며, 본존상의 머리 뒤쪽에는 원형 두광(頭光)이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불상의 몸 곳곳에는 채색한 흔적이 남아있고, 큼직한 이목구비에 미소를 머금은 자비로운 인상을 주고 있다. 과감하게 생략된 옷주름, 연화대좌의 소박한 형태와 세부적인 조각 수법 등에 비추어 볼 때 고려중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정씨 약사불로 불렸으나, 약사불로 볼 수 있는 도상적 근거가 미약하여 2021년 9월 8일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상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전주류씨 효자정문(全州柳氏 孝子旌門)

전주류씨 효자정문(全州柳氏 孝子旌門)

정려문은 충신․효자․열녀․ 등 타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의 행적을 널리 알리고자 연고가 있는 마을 입구나 집 대문 앞에 나무로 만들어 세우던 붉은 문이다. 일명 정문(旌門), 작설(綽楔), 홍문(紅門)이라 한다. 전시하고 있는 정려문은 수원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류태명(柳泰明, 1666~1716)과 류의(柳誼, 1734~1709)의 효자 정려문으로 전주류씨 문중에서 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복제한 것이다.

금곡동 고인돌

금곡동 고인돌

수원 칠보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던 금곡동 고인돌은 잘 다듬은 받침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경기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덮개돌을 얹은 탁자식으로 권선구 호매실지구 택지개발에 따라 2009년 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이전 복원하면서 원래 있었던 좌우 받침돌과 동일한 형태와 질감으로 앞뒤 받침돌을 모형 제작하여 보완 설치하였다.

연자방아

연자방아는 곡식을 찧는 도정(搗精)기구로 평평한 원형의 돌 위에 둥근 돌을 얹어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해 돌린다. 이 연자방아는 수원시 화서동에서 개관 당시 옮겨 왔다.

옹기

옹기는 우리나라에서만 만들어 사용하던 독특한 것으로 음식 저장 용기이다. 박물관 앞뜰에 유물기증자들이 직접 사용했던 옹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금곡동 청동기시대 움집터

금곡동 청동기시대 움집터

이 움집터는 청동기시대(약 B.C 1,000년 전) 수원시 금곡동(옛 중촌마을이 있던 낮은 언덕)에 자리하던 것을 모형복원 한 것이다. 움집터 주변으로는 20여 기의 거의 동일 시기의 움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움집은 이른바 화재주거지로, 당시 사용하던 생활용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청동기시대 수원 지역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움집터 안에는 화덕 3개, 기둥구멍 28개, 벽 구멍 12개, 저장 구덩이 8개가 남아 있으며, 곡식이나 물을 담아 주는데 사용하는 항아리와 바리 등을 비롯하여 나무를 찍거나 가공하는데 사용하는 도끼, 무언가를 베는데 사용하는 돌칼,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빻는데 사용하는 갈판과 갈돌, 이밖에 돌화살촉과 대롱옥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움집터 안에 생활용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움집터 내에 전염병이 돌아 일부러 불을 내고 폐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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