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예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상설 전시실을 갖춘 서예 전문 박물관입니다.
석문·법서·조선명필·서간·어필·근대명인·사군자·문방사우·사랑방 등의 주제를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서예사의 흐름을 알 수 있도록 성격과 시기에 따라 중요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각 주제별 코너마다 설명 패널을 배치하여 전시 구성품에 대한 이해가 쉽도록 하였으며 서예의 감상과 이해를 돕고자
전시실 입구에 영상매체와 터치스크린을 활용한 교육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금석문은 철이나 청동(靑銅) 같은 금속재료에 글자를 새긴 금문(金文)과 석재(石材)에 글씨를 새긴 석문(石文)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금문에는 동종(銅鐘)이 석문에는 비석(碑石)이 대표적인 유물로 알려져 있으며 흙으로 빚은 토기, 기와, 전돌 등의 명문(銘文)도 금석문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금석문은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되는데, 광개토대왕비나 진흥왕순수비 등의 삼국시대 비문은 역사 문헌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사실이 적혀 있어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탑비(塔碑), 고려시대 묘지(墓誌), 조선시대 묘비(墓碑)는 역사와 문화 연구뿐만 아니라 서예사(書藝史) 자료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공간은 문헌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 분야에서 중요한 부분인 금석문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대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습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금석문 탑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정유(鄭裕)·정희린(鄭姬隣) 묘갈을 전시 공간에 배치하였습니다.
법서(法書)란 후대의 법칙과 모범이 될 만한 옛 명인의 필적을 말합니다. 법서에는 진적(眞蹟), 모사본(摹寫本), 탑본(搨本)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법서를 학습하거나 감상하기 위해 돌이나 나무판에 새겨 탑본을 뜨고, 이를 배접하여 첩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법첩(法帖)이라고 합니다.법서를 그대로 따라 익히는 방법인 모서(摹書)와 임서(臨書)는 서예 학습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써 이를 반복적으로 학습해서 숙달된 뒤에야 창의적인 작품 활동이 가능합니다.법서 중에서도 왕희지(王羲之)의 필적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서예 학습의 모범이 되었으며 후대의 서예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시된 법첩을 통해 이를 따라 익히던 당시 사람들의 학습 방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문신, 학자 중에 명필이 많았고 사자관(寫字官) 등의 직업서예가가 많았습니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명필(四大名筆)로 알려진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석봉(石峯) 한호(韓濩), 자암(自庵) 김구(金絿),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있으며,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퇴계(退溪) 이황(李滉),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등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서화에 능했던 신사임당(申師任堂)은 부덕과 교양을 갖춘 여류예술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양송체(兩宋體)를 창안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고전(古篆)에 능한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있으며 문인(文人) 명필로 이름을 떨친 백하(白下) 윤순(尹淳)과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완성시켜 조선을 비롯한 중국에도 큰 반향을 일으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있습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서가의 필적을 통하여 유행 서풍의 형성과 그 변모 과정을 살필 수 있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서간은 개인 간의 의사를 전달하는 글로 서찰(書札), 간찰(簡札), 서독(書牘), 간독(簡牘), 척독(尺牘), 편지(片紙), 소식(消息)이라고도 합니다.우리 조상은 선현의 자취를 중시했고 특히 일상의 고락(苦樂)이 곡진하게 담긴 서간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옛 서간은 왕실을 비롯한 양반, 관료, 문인 또는 그들의 부인이 쓴 것이 대부분이며, 이밖에 서민의 것도 있습니다. 내용은 안부가 가장 많고 감사, 부탁, 상의, 보고 등 다양합니다. 대개 낱장으로 써서 봉투에 넣거나 접어 보내는데, 옛날 그대로 전하거나 가문, 인물, 계층 별로 엮은 첩으로도 전합니다. 서간은 실용적으로 작성된 것이나 서예작품과 달리 쓴 사람의 성향과 심리가 잘 반영되어 있어 꾸밈없는 글씨를 살필 수 있습니다.
어필은 제왕(帝王)의 글씨를 말하며 어서(御書), 신한(宸翰)이라고도 합니다. 또 황후와 왕후의 글씨도 어필이라고 하며, 세자(世子)의 글씨는 예필(睿筆)이라 합니다. 조선시대에 왕이 승하하면 생전에 남긴 어필을 간행하고 이를 존각(尊閣)에 간직하는 등 그 위업을 기렸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현종 초에 문종(文宗) 등 아홉 임금의 필적을 모아 《열성어필(列聖御筆)》을 간행하고, 다음 왕이 즉위하면 선왕의 어필을 이어 간행했던 일입니다. 현존하는 어필은 대부분 조선시대 것입니다. 임금은 신하에게 서찰을 보내고 궁궐의 전각에 게시할 글씨를 쓰며, 역대 명신과 충신의 비문을 쓰는 등 다양한 필적을 남겼습니다. 이들 어필에서 군왕의 위엄과 덕행, 군신(君臣) 사이의 정리(情理)를 살필 수 있습니다.
조선말기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까지 활동한 근대 명인(名人)의 필적을 전시하였습니다. 먼저 추사의 말년 제자인 허련(許鍊)을 비롯하여 정학교(丁學敎), 김성근(金聲根), 김가진(金嘉鎭), 안중식(安中植) 등 구한말에 활동한 인물과 오세창(吳世昌), 김돈희(金敦熙), 이한복(李漢福) 등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서예가의 글씨를 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조소앙(趙素昻), 광복 이후에 활동한 손재형(孫在馨)과 현중화(玄中和)등의 작품도 다양하게 포괄하였습니다. 특히 돋보이는 작품은 김용진(金容鎭) 등 6인의 합작 병풍으로 당대 서예가 및 서화가의 필적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사군자(四君子)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이르는 말입니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이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고, 난초는 깊은 산중에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국화는 늦은 가을 첫 추위를 이겨내고,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잎을 유지한다는 각 식물 특유의 속성을 군자(君子)에 비유한 것입니다. 산수화(山水畵)나 화조화(花鳥畵)의 일부분으로 다뤄지기 시작한 사군자는 원(元)과 명(明)을 거치면서 문인화의 대표적인 분야로 자리 잡았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된 사군자는 조선말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림과 글씨가 동일하다고 여기는 전통적 사고 속에서 사군자는 서예와 밀접한 분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화제(畵題)와 그것을 쓴 서체 그리고 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근대기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사군자화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문방사우란 선비들이 글방에서 친구처럼 늘 가까이 하는 네 가지의 문방구를 말합니다. 지(紙), 필(筆), 묵(墨), 연(硯) 즉 종이, 붓, 먹, 벼루입니다. 또 글방의 네 가지 보배라는 뜻에서 ‘문방사보(文房四寶)’라고도 하는데, 이는 송나라 소이간(蘇易簡)의 『문방사보(文房四譜)』란 책이름에서 나왔습니다. 문방사우를 비롯하여 붓을 걸쳐두는 필가(筆架), 먹 가는 물을 담는 연적(硯滴)을 전시하였고, 글씨나 서화 혹은 중요 문서에 찍었던 인장과 인재를 종류별로 전시하는 코너를 마련하여 볼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사랑방은 남성 즉 선비가 사용하던 거처이자 손님 접대를 위한 응접실로 주택 외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습니다. 선비가 주로 생활하던 사랑방을 재현한 이 공간에는 자연미를 살린 소박한 가구와 집기, 실용적인 문방구를 전시하였습니다. 경사(經史)를 읽고 시문을 읊으며 서화를 즐기면서 친우들과 담소를 나누고 생각에 잠겼던 조상들의 고상한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예는 점(點)과 획(劃)으로 구성된 문자의 형태와 그 의미를 붓과 먹으로써 전하는 예술입니다. 마치 그림에서의 추상화와 비슷합니다.
붓끝의 움직임에 따라 점과 획이 모여 글자를 이루고, 글자가 모여 글줄을 이루며, 이것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우리는 시원스럽게 써낸 글씨를 두고 ‘일필휘지(一筆揮之)’라고 합니다.
단 한번의 붓질로 머뭇거림 없이 쓴다는 뜻입니다. 이 말 속에는 이미 쓴 글자를 고치거나 덧칠할 수 없다는 일회성(一回性)의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서여기인(書如其人)’ 즉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쓰는 사람의 인품이 글씨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우리 조상은 서예를 인간의 심성을 길러주는 교양으로 여기고 그 가치를 지켜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예는 전통과 실용성을 지닌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씨에는 쓴 사람의 감성이 고스란히 살아납니다. 그래서 글씨를 올바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글씨의 면을 구성하는 것을 ‘장법’이라고 합니다. 즉 글자와 글자 사이, 또는 글줄(行)과 글줄 사이를 어떻게 배열해야 하는 것인가를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글자를 반듯이 배열하면 통일감을 주고, 반대로 불규칙하게 배열하면 변화감을 줍니다. 특히 글자와 글줄 사이의 여백(餘白)이 그런 분위기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전서나 예서 그리고 해서에서는 대체적으로 정연한 자간과 행간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행서나 초서에서는 글자의 크기와 점획의 운용에 있어 변화의 폭이 크므로 자간과 행간에 보다 복잡한 방법이 사용됩니다.
단조로운 장법의 글씨
유방평(劉方平) 채련곡(采蓮曲) / 17세기 / 조속(趙涑)변화로운 장법의 글씨
사마광(司馬光) 회소서(懷素書)/18세기/조윤형(曺允亨)글자의 표정을 이루는 절대적 요소는 ‘결구’입니다. 이것은 글자의 점과 획을 얽는 방식, 즉 짜임을 말합니다. 예컨대 글자를 탄탄하게 짤 것인가 느슨하게 풀 것인가 아니면 반듯하게 쓸 것인가 비뚤어지게 쓸 것인가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자의 크기인 대소(大小), 글자꼴[字形]이 가로로 납작하거나 세로로 길쭉한 정도인 평장(平長), 글자의 변(邊)과 방(傍), 머리와 받침의 호응 또는 대치의 정도인 향배(向背)가 있습니다. 또한 점획의 장단(長短) ·태세(太細)·비수(肥瘦)·곡직(曲直)·정사(正斜)·억양 등으로 인해 발생되는 글자와 여백의 소밀(疎密) 관계를 균형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글자꼴이 긴 짜임의 글씨
제갈공명(諸葛孔明) 어구(語句) / 19세기 / 이남식(李南軾)글자꼴이 납작한 짜임의 글씨
주희(朱熹) 다조(茶竈) / 19세기 / 유한지(兪漢芝)글자는 점획의 표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그 표현은 붓을 사용하는 방법에 달려 있습니다.예를 들면, 붓끝의 처리에 따라 점획이 둥글어지기도 하고 모가 나기도 하며, 또 곧바르게 되기도 하고 굽어지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전서에서는 붓을 둥글게 돌리는 원전(圓轉)을 많이 사용하고 예서에서는 붓을 모나게 꺾는 방절(方折)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또 전서와 초서에서는 곡선의 표현이 중요하고 해서에서는 직선의 표현이 중요하며 예서와 행서에서는 곡선과 직선을 융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필의 글씨
시평공조상기(始平公造像記) / 북위(北魏) 5세기말원필의 글씨
정희하비(鄭羲下碑) / 북위(北魏) 511년붓을 운용하는 방법을 ‘운필’이라고 합니다. 즉 붓을 곧게 세우느냐 비스듬히 하느냐 또는 쓰는 속도를 빠르게 하느냐 더디게 하느냐에 따라 점획의 성질과 글자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붓의 움직임이 빠르고 힘있게 그은 것과 천천히 부드럽게 그은 것은 붓의 속도, 종이에 스며든 먹의 양, 종이에 가해진 압력 등에서 서로 다르며 이에 따라 표현된 결과도 달라지게 됩니다.
운필 속도가 빠른 느낌의 글씨
12인의 병풍 / 1915~22년경 / 유창환(兪昌煥)글씨를 쓸 때에는 먹색을 어떻게 내는가의 용묵법도 중요합니다. 즉 먹물의 양과 농담, 색조 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글씨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진한 농묵(濃墨)을 사용하면 흑과 백의 대비가 확실하여 글씨의 명암이 뚜렷해지고 필선이 강렬하며 깔끔해지지만 지나치면 질감이 둔중해지기 쉽습니다. 반대로 묽은 담묵(淡墨)을 사용하면 바탕과 융합된 색채를 띠어 온화하고 여유로워지나, 지나치면 질감이 나약해지기도 합니다. 또 먹물의 양이 충분하면 운필이 부드러워지고 먹색이 윤택해져 넉넉한 분위기를 이루지만 필세가 약해지기 쉽습니다. 이에 비해 먹물의 양이 부족하면 운필이 껄끄러워지고 먹색이 마르게 되어 조야(粗野)하고 호방한 분위기를 이루지만 점획의 형세가 뭉그러지기 쉽습니다.
먹물의 양이 많은 글씨
칠언절구(七言絶句) / 1925 / 김돈희(金敦熙)먹물의 양이 적어 까칠한 느낌을 주는 글씨
맹자(孟子) 만장(萬章) 상(上) / 17세기 / 허목(許穆)문자는 특성상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한 실용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의 조화와 어울림을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감상하려는 미적인 요구 아래 다양하게 변천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문자의 표현 방법에 있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서체가 만들어지고 발전하였으며 때로는 크게 유행하였다가 곧바로 사라지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자의 서체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다섯 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경우에는 초기의 인쇄체인 판본체(板本體)와 궁중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필사체로서 발달한 궁체(宮體)가 있습니다.
서체의 종류와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관심을 갖고 감상한다면 보다 깊이 있고 풍부한 서예 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전서는 예서와 함께 진한(秦漢) 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서체로서 고문(古文), 대전(大篆), 소전(小篆) 등의 종류가 있습니다. 고대에는 길흉을 알아보기 위해 점을 치는데 그 점괘를 거북이 등뼈나 소뼈 등에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갑골문(甲骨文)이라고 합니다. 또 솥이나 종 등의 금속에 글씨를 새기기도 하는데 이는 종정문(鍾鼎文)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서체들은 고문(古文)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서는 쓰임에 있어서 간략화되거나 정비되기도 하였는데 그중 소전은 진나라 때 체계적으로 정비가 이루어져 이후에는 전서의 전형으로 여겨져 오고 있습니다. 전서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마지막 단계의 서체인 소전은 중후하고 안정감을 주는 글자체입니다. 비석의 두전(頭篆: 비석의 머릿부분)에는 통상적으로 전서를 사용하였으며 전통시대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도장을 새길 때 전서를 이용하는데 이는 전서의 중후한 맛과 권위적인 멋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서는 초서, 행서, 해서와 같은 쓰기 편리한 서체가 출현하자 이어져 나온 예서와 함께 장식적이고 의례적인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며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진나라 때 성행했던 전서의 번잡함을 없애고 한나라 때 널리 유행했던 서체입니다. 예서라는 명칭은 당시의 기준 서체였던 전서에 예속된 부차적인 서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예서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파세(波勢)와 갈고리[鉤], 파임[磔]과 같은 필세가 강하게 나타나는데 특히 동한시대의 예서를 팔분(八分)이라고 별칭(別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서의 필의가 많이 남아있는 서한시대의 예서를 고예(古隸)라고 통칭하기도 합니다. 또 예서와 관련하여 고대 서체의 하나였던 비백(飛白)이 있습니다. 비백은 예서를 마치 흩날리듯 가볍게 쓰는 것으로 동한(東漢)의 영제(靈帝)때 채옹이 홍도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공인(工人)이 백토를 칠하는 납작 붓으로 글씨 쓰는 것을 보고 비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로 궁궐 건물의 편액 글씨로 사용되었으며 당나라 때까지 장식 서체로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당나라 때의 비백 필적을 살펴보면 행서나 해서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서체로서의 명칭보다는 쓰는 기법에 따른 명칭으로 여겨집니다.
해서는 여러 서체 가운데 가장 후대까지 정리된 서체입니다. 한나라 말에 발생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하였고, 수(隋)를 거쳐 당나라 초기에 들어와 완비되었습니다. 옆으로 길고 납작한 형태의 예서식 짜임에서 점점 정방형의 짜임으로 변화되었고, 파세(波勢)나 갈고리[鉤], 파임[磔] 등이 점점 단정해져 곧은 형태의 규범적 필획으로 정리되었습니다. 해서 중에서도 방필(方筆)의 방정(方正)한 골격이 잘 드러나며 호방하고 웅건한 풍격을 보이는 이같은 서체를 흔히 육조체(六朝體)라고 통칭하며 북위시대의 시대적 풍격도 공유하고 있어 서예사에는 ‘북위서(北魏書)’라고도 합니다.
흔히 해서를 조금 흘려서 이어지듯 쓰는 서체를 행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행서는 원래 해서나 초서와 함께 예서로부터 출발하여 한나라 이후 독립 서체로 발전하였으며 실제 해서에 앞서 정비된 서체입니다. 행서는 초서와 함께 전서나 예서에 비해 좀 더 자유롭고 비정형이기 때문에 글씨의 예술적 영역을 넓히는 주된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종요와 동진(東晋)의 왕희지, 왕헌지는 오랜 기간 동안 서예사의 전형적 모범으로 여겨져 왔으며, 그들의 해서와 함께 원명대(元明代)의 대표적인 복고주의 서예가들에 의해 고법의 핵심으로 귀중하게 여겨져 왔습니다.
초서는 여러 서체의 변화 과정 속에서 궁극점에 도달한 서체입니다. 초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진나라 말이나 한나라 초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었다고 합니다. 그 변화는 장초(章草)·금초(今草)·광초(狂草)의 순서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장초는 한나라 때의 통용 서체인 예서에서 나온 것으로 점획을 줄이거나 잇고 운필을 좀 더 빠르고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일부 글자에서 예서의 파세(波勢)처럼 획을 넓게 펼친 운필을 보이는 초서입니다. 금초는 장초가 점점 변화하여 대략 동한시대 말이나 삼국시대에 걸쳐 정비되었고 그 후 왕희지 등에 의해 정형화된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초서를 말합니다. 장초에서의 간략하고 반복적인 운필, 글자 사이의 드문 연결, 점을 강조하는 특징들이 보다 긴장감 있고 주의 깊게 정비된 운필법에 의해 표현됩니다. 또 두 글자 이상을 연결시키는 방법이 진전되는 등 점획의 연결과 운필의 흐름이 중시됩니다. 광초는 장법, 결구, 획법 등에 있어 변화의 폭이 매우 큰 방일(放逸)한 초서를 말합니다. 한 행에 대여섯 글자로 크기를 번갈아 써가다가 간간이 네 글자로 변화를 일으키고, 뒷부분에서 두 행의 공간을 세 글자로 처리하거나 세 행의 공간을 단지 두 글자로 처리하기도 하며, 각각의 행을 반듯하게 쓰기도 하고 한쪽으로 삐뚤게 쓰기도 하는 등 장법이 매우 변화로운 초서입니다.
한글 창제 직후에 나온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의 판본에 사용된 글씨체를 말합니다. 오래된 글씨체라는 의미에서 고체, 또는 훈민정음을 본받아쓴 글씨라는 의미에서 ‘정음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국어와 한자를 섞어서 사용함으로 혼서체라고 하며 ‘필사체(筆寫體)’라고도 합니다. 판본체의 획이나 글씨의 짜임이 엄격하고 도식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쓸 수 있도록 변모한 서체입니다. <월인석보> <두시언해> 에 사용된 글씨체입니다.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 궁중에서 궁녀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에 궁체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한글 창제 이후 한글 판본체(板本體)가 읽기는 쉬워도 쓰기 어려우므로 차츰 쓰기 편한 필사체로 변화 발전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궁체는 글씨의 선이 곧고 품위가 있어 여성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내서(內書)라고도 불렸습니다.